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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꼬막이 있는 밥상 / 박어진

등록 2011-12-23 19:15

박어진 칼럼니스트
박어진 칼럼니스트
깨어난 국민의 역량이 폭풍 변화를
가져올 새해를 기대하는 것도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친구들과 밥 먹기를 무지 좋아하는 터라 꼬막 시즌이 반갑다. 남도의 인터넷 몰에 주문하자 꼬막 5㎏이 득달같이 도착한다. 포장재로 스티로폼 박스를 쓴다는 생각에 꺼림칙한 것도 잠시, 마트 상품과 비교를 거부하는 싱싱함에 이내 반하고 만다. 꼬막에는 양념이 필요 없다. 해감을 하는 둥 마는 둥, 펄펄 끓는 물에 청주 한 숟갈을 넣고 살짝 데쳐 까먹는 게 최고다. 그 통통하고 쫄깃한 맛이라니. 벌교 개펄의 생명력과 여성 어민들의 수고에 경의를 표하며 행복하게 먹는 게 정답이다. 화이트 와인 한잔까지 곁들이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다. 혼자 먹는 게 너무 아까워, 아니 부도덕하다는 생각에 겁없이 손님들을 청한다. 친구들이 온다.

올 한해 우리들의 업적에 대한 평가가 주요 화제다. 배드민턴의 마법에 걸린 친구는 파스로 도배한 팔목을 휘두르며 배드민턴 복음을 전파한다. 지난 3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유출 사고 이후 반핵에 앞장서온 친구는 우리 모두의 총체적 안전불감증이 초래할 미래에 우려를 쏟아낸다. 늦둥이 고3 아들을 대치동 학원가로 실어 나르느라 바빴던 친구는 대한민국 교육제도에 의한 극심한 피로감을 호소한다. 허리를 다쳐 내내 빌빌거렸던 나는 몸이 얼마나 존엄한 것인지 실감했다고 고백한다. 갱년기 초입에 들어선 한 친구는 소문으로만 들었던 갱년기 우울증에 대처하는 게 생각보다 훨씬 힘들다고 발표한다. 강요된 퇴직으로 여름부터 자살충동에 시달렸던 한 친구는 자신의 상황이 혼자만의 지옥이 아니라는 사실에 묘하게 위로받았다고 말한다. “내가 건강하다는 게 이젠 그냥 기뻐.” 지옥을 통과해 나온 사람만이 그렇게 웃을 수 있으리라.

맞다. 어렵사리 진전시켜온 민주주의가 뒷걸음질을 했던 몇년을 목격하면서도 우린 웃을 수 있다. 서구 수입상품인 민주주의가 이 땅에서 이만큼이나마 국산화 과정을 밟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자고 서로를 격려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원하는 속도는 아니더라도 이 땅의 제도와 사람들의 생각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우리는 목격해 왔다. 소란스런 복지 논쟁도 반갑기만 하다. 이미 깨어난 국민들의 역량이 폭풍 변화를 가져올 새해를 기대하는 것도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절대로 절망하지 않는 우리들은 훌륭하다. 우린 다시 서로에게 건배한다. 나라 걱정하는 5학년 언니들의 에너지가 넘쳐흐르는 이 땅은 축복받은 나라임에 틀림없다고 목청을 높이면서.

갱년기 이후의 삶도 자연스런 화제다. 퇴직한 친구들이 늘어나니, 검소하면서도 궁상스럽지 않게 살아가겠다는 목표를 공유하게 된다. 명상을 오래 해온 한 친구는 깨달음에 대해 말한다. 아니, 오래 꿈꿔온 깨달음에 대한 열망이 스르르 없어졌다고 말한다. 궁극의 깨달음을 얻으려 너무 애쓰지 않기로 작정하고 나니 오히려 평범한 일상이 즐거워졌다는 거다. 이제야 자기 마음속에 도사린 편견이나 고집이 하나하나 들여다보인다는 그 친구. 그동안 오만한 자아의 색안경을 끼고 사람들을 대해 왔다고 말한다. 갑자기 자기중심주의 내지는 자기정체성이란 이름의 에고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토론이 활성화된다.

우리 나이 십대였을 때, 지금 우리 나이 또래의 할머니들이 모여 앉아 하하호호 웃는 걸 보면 의아했었다. “아니, 저 나이에 도대체 즐거울 일이 있기나 한 거야?” 바로 그 나이가 되어보니 분명히 알겠다. 세상에 즐거운 일이 충분히, 그리고 여전히 많다는 걸. 나와 더불어 발효숙성 과정에 있는 친구들을 가진 게 그중 제일 즐겁고 든든한 일이다. 건배해야 할 충분한 이유다.

박어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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