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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특파원 칼럼] 조문, 17년 지나 제자리 / 권태호

등록 2011-12-22 19:32수정 2011-12-22 21:09

권태호 워싱턴 특파원
권태호 워싱턴 특파원
17년 전에도 외교적 차원의
조문은 괜찮다던 자유총연맹 간부
1994년 7월, 당시 경찰기자였던 나는 충북 단양에서 수해로 인한 단양팔경 훼손 현장을 취재중이었다.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모든 걸 중단하고 서울로 올라오라”고. ‘김일성 사망’ 발표 날이었다. 서울로 올라오면서 카폰으로 시민단체 반응을 모으는데, 사건팀장(캡)의 추가 지시가 떨어졌다. “남산 자유총연맹 본부에 가서 그쪽 반응도 따보라”는. 토요일이었다. 본부에는 50대 간부 한 분이 당직근무를 서고 있었다. 무척이나 더웠던 그해 여름, 사무실로 들어선 내게 그분은 주스를 건넸고, 이런저런 물음에도 선선히 답해줬다. ‘조문을 가는 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6·25를 일으킨 김일성의 죽음을 슬퍼할 순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애도가 아니라 외교적 차원에서 조문을 가는 것도 괜찮다고 봅니다”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이 답변에 별반 주목하지도 않고 당연한 듯 들었다. 당시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해빙 무드가 무르익던 때였고, ‘조문 파동’이 일어나기 전이었다. 그분의 답변도 기사 속 멘트 한 줄로 간단히 보도됐을 뿐이다.

며칠 뒤 그분이 회사로 찾아왔다. “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으니 정정보도를 해달라”는 것이다. 그때는 ‘조문 파동’이 온 나라를 들썩일 때라 충분히 이해했지만 당황스러웠다. 난색을 표하자, “알겠다”며 물러갔다. 얼마 뒤 언론중재위원회에 출두했다. 위원회는 그분의 손을 들어줬다. “자유총연맹 간부가 이런 말을 했을 리 없다”는 게 근거였다. 거기에 ‘입사 1년이 안 된 기자이기에 실수했을 수 있다’는 게 덧붙었다. 며칠 뒤 반론보도가 조그맣게 나갔다.

17년이 지났다. ‘김정일 사망’ 보도는 워싱턴에서 접했다. ‘조문 파동’까진 아니어도 ‘조문 논란’이 또 일어난다. 이명박 정부가 “정부 차원 조문은 않되, 민간 차원 조문은 제한된 범위에서 허용, 북한 주민에게 위로” 등의 고육지책을 내놓았을 때, 기대치가 낮았던 탓인지 ‘그나마 다행’이라는 게 첫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번 결정은 씹어볼수록 안타깝다. “이것은 조문을 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니여”라는 몇년 전 개그가 떠오른다.

이명박 정부는 무척 고심했을 것이다. 조문에 대한 국민 생각도 바뀌었고, 남북관계 개선 기회로 활용하고 싶은 마음도 있는 반면, 한쪽으론 한나라당 표밭인 보수층의 반발도 우려했을 것이다. 그래서 ‘정부 아닌 주민 애도’, ‘북한 조문단이 온 유족들의 조문 허용’을 ‘묘수’인지 ‘꼼수’인지 내놓았는데, 결과는 진보·보수 양쪽 모두로부터의 비판이다. 늘 이렇다.

정부는 노무현재단의 조문단 파견을 불허하면서 “조문단이 남쪽에 오지 않았다”, “국민 정서를 고려해” 등의 이유를 들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당시 북한이 조문단을 보내려 했지만, 이명박 정부가 난색을 표해 북한 조문단은 개성에서 조의문만 읽고 돌아갔다. 20일 <중앙일보> 여론조사에서 ‘정부가 북한 당국에 조의를 표하는 것’에 65.4%가 찬성했다. 19일 ‘리얼미터’ 조사에선 정부의 공식 애도 표명에 49.6%가 찬성했고, 반대는 31.4%였다. 정부가 말하는 국민 정서는 뭔지 궁금하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당시 실용정부라 했는데, 그동안 행적을 보면 실용정부도 이념정부도 아니고, 엉거주춤하다. 국가적 실리는 물론 정치적 실리도 못 챙기기 일쑤였다. 정보 무능을 비판받자, 뜬금없이 “북한 발표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애매하다”며 의혹을 제기한 건 우국충정인가, 진실규명인가? 아니면 ‘나, 이 정도는 알아’인가?

세상은 달라지는데, 정부는 제자리. 17년 전 자식뻘 되는 젊은 기자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날벼락 맞았을 자유총연맹의 그분은 이번 조문 논란을 여유롭게 봐주셨으면 한다. 권태호 워싱턴 특파원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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