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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버리고 싶은 유산 / 구본권

등록 2011-12-08 19:16

조병화(1921~2003) 시인은 1949년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냈다. 해방된 조국이었지만, 도쿄 유학을 경험한 젊은 시인에게 가난하고 분단된 나라의 현실은 남루할 뿐이었다. 시인은 시집 첫머리에서 “무거운 유산을 버리자”고 말했다.

민법은 상속자에게 자산과 빚이 모두 상속되는 당연상속제이지만, 빚이 더 많은 ‘버리고 싶은 유산’의 경우에는 상속 포기나 한정상속을 선택할 수 있다. 과거의 조직이나 상품과 고객을 물려받은 정당이나 기업도 유사한 고민을 겪는다. 자산을 상속받기로 하면 부채도 책임져야 하는 게 개인이나 조직의 도리이다. 이름만 슬쩍 바꾼 뒤 “자산만 상속하겠다”는 구호는 기만적이다. 정당들이 위기 때마다 해산하고 재창당을 하지만 이름이 바뀐 것에 불과한 경우인 것도 이런 욕심이 배경이다.

변화가 빠른 정보기술 업계에선 과거의 사용 환경과 프로그램이 ‘레거시’(legacy·유산)란 용어로 정착했다. 과거의 유산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가 새 상품의 최대 과제가 되는 경우도 있다. 3년 주기로 새 컴퓨터 운영체제를 내놓는 마이크로소프트한테 최대의 걸림돌이자 도우미는 기존 상품이다. 새 운영체제를 만들어낼 때 기존 제품을 지원해야 한다는 점은 족쇄인 한편 고객 유인 요소다. 기존의 윈도 환경에서 작동하던 모든 프로그램을 지원하게끔 윈도7을 설계하자면, 초기 개발 단계와는 비교할 수 없이 복잡한 업무가 된다. 하지만 과거에 산 프로그램을 새 운영체제에서도 계속 쓸 수 있다는 점은 중요한 구매 요소다.

케이티(KT)가 1997년 시작한 2세대(G) 이동통신 서비스도 4세대 엘티이(LTE) 시대에 ‘버리고 싶은 유산’ 신세가 됐다. 법원은 지난 7일 2G 서비스 종료 6시간을 남기고 방송통신위원회와 업체의 과속에 제동을 걸었다.

구본권 기자 starry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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