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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석류 / 황선미

등록 2011-12-02 19:05수정 2011-12-06 16:57

황선미  동화작가
황선미 동화작가
왜 하필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느냐며
친구가 울먹일 때는
나도 같이 울어주지 못해 미안했다
오전 내내 안개가 심하더니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날이 좀 추웠더라면 첫눈을 볼 수 있을 걸, 아쉬워하며 문화센터로 갔다. 일주일에 한 번 나를 위해 노는 날. 나는 여기서 재미난 걸 처음 발견한 아이처럼 온전히 집중해서 손이 까매지도록 연필을 가지고 논다. 언젠가는 내가 느끼는 걸 자연스럽게 그릴 수 있기 바라며. 그러나 선 하나 긋기가 여전히 어려우니 내 전공 외의 일들에 대해 나처럼 서툰 사람이 없을 듯하다.

로비로 친구가 찾아왔다. 새로 산 코트의 단추가 없어져서 매장에 나왔다며 입꼬리만 올려 웃어 보이는 친구. 얼굴이 까실하고 입술도 부르터 있었다. 석류가 많이 들어왔어. 먹어봐. 친구가 종이가방을 내미는데 플라스틱 그릇에 밴 김치 냄새가 훅 끼쳤다. 맛이나 보라고 김장김치를 조금 줬더니 빈 그릇 돌려주기가 뭐했는지 석류 세 개를 담아 온 것이다. 비 오는 날 손에 든 것이 많으면 성가시기는 해도 석류라는 걸 직접 쪼개서 먹어본 적이 없어 고맙게 받았다.

친구는 단추 하나를 얻자고 코트까지 들고 매장에 나와야 했다며 어이없어했다. 수능 본 둘째 이야기도 하고, 염색이 빠져 희끗해진 내 머리카락 이야기도 하고, 보험금 지급에 앞서 보험회사가 얼마나 치사하게 굴었는지도 이야기하고, 유기농 채소라는 걸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에 대해서도 말했다. 남편이 주삿바늘을 빼러 병원에 갔다는 말을 들으며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메마르고 터져 딱지가 앉은 입술. 나의 새치 못지않게 하얘진 친구의 정수리를 보자니 가슴 싸해도 그저 묵묵히. 친구 남편은 지금 큰 수술을 앞두고 항암치료 중이다. 나는 기껏 해오던 전공을 접고 다른 공부를 찾으려는 자식 때문에 속이 터지는 사정, 귀농을 결심하고 들떠 있는 남편을 바라보는 게 어떤 심정인지 털어놓았다. 채 삼십분도 안 되는 시간에 그렇게 서로의 근황을 확인하고 친구는 남편의 끼니때를 맞추려고 총총히 돌아갔고, 나는 올해 마지막 수업을 위해 교실로 들어왔다.

힘겨운 상황과 동행하게 된 친구를 보내고 다시 스케치북에 선 긋기를 시작하는 나. 마치 호사를 누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일상. 심각한 진단을 받든 가슴 쿵 떨어지는 일을 감당해야 하든 내가 나일 수 있고 우리가 아직 우리일 수 있다면 괜찮은 거다. 열심히 살았건만 왜 하필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느냐며 친구가 울먹일 때는 나도 같이 울어주지 못해 참 미안했다. 그러나 친구는 눈물을 오래 보이지 않았고, 나도 별스럽게 굴며 위로하지 않았다. 그저 나눌 수 있는 걸 나눠줄 때 친구가 자존심 상하지 않기만 바랄 뿐. 어느덧 누군가의 부고, 자녀를 출가시키는 동료의 청첩장을 받는 나이가 됐다는 사실도 섬뜩하지만, 사회에서 밀려나 정신이 피폐해진 친구의 전화를 받거나 형제의 암 진단에 막막해지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다. 그러나 감당키 힘든 상황이라도 일상은 이어지고 내가 나로서 살아갈 수 있는 일상이란 공기와 같은 축복임을 깨닫는다.

석류를 쪼개며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알알이 반짝이는 과육에서 터져 나온 붉은 즙이 주방의 하얀 타일에 선명한 자국을 남겼다. 메마르고 단단한 껍질이 품은 게 바로 이거였구나! 황홀하고 싱싱한 루비가 한가득. 아픈 가슴으로 일상을 견디고 있으면서 나까지 챙겨준 친구. 부르튼 입술 꼬리만 올려 간신히 웃던 친구가 생각나 코가 시큰했다. 그래. 너무 가진 게 없어서 마음마저 가난뱅이 고슴도치만 같았던 나를 위해서 나도 없는 자취방에 연탄불을 피워두고 간 사람이 너였지. 그때 우리는 스물두살쯤. 와락 부끄러움이 인다. 오늘 나에게는 석류가 왔다. 황선미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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