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빈 논설위원
FTA를 통해 수입되는 미국의
법과 제도가 선진국 길잡이라는 증거 있나?
법과 제도가 선진국 길잡이라는 증거 있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놓고 찬반양론이 뜨겁다. 국회에선 비준안을 강행처리하려는 여당과 결사저지하려는 야당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여당과 야당 모두 ‘국익’을 내걸고 목소리를 높인다. 일상에 바쁜 국민은 의아할 성싶다. 도대체 이 협정이 뭐기에….
무려 700여쪽에 이르는 협정문 한글본을 처음 읽어보면 마치 암호문 같다. 법률 전문가들조차 이해하기 힘들다고 한다. 그래도 이 협정이 ‘세상을 크게 바꾸겠구나’라는 느낌은 온다. 어떻게 바뀔지에 대해 정부는 국책연구기관의 경제효과 추계치로 장밋빛 그림을 그려 보여준다.
경제적 기대효과는 협정 발효 뒤 10년 동안 ‘국내총생산(GDP)이 5.66% 늘어나고 일자리가 35만개 생긴다’로 요약할 수 있다. 연평균으로 환산하면 0.47% 성장과 3만5000개 일자리다. 대미 무역수지에서는 연간 1억4000만달러가량 흑자 증가를 예상한다. 우리나라 교역규모를 고려하면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원론 수준의 경제지식으로도 당장 의문이 생긴다. 무역수지 개선 효과가 거의 없는데 어떻게 협정이 경제성장과 일자리 창출의 발판이 되나?
무역수지를 제외한 성장 변수는 국내 소비와 투자, 그리고 정부지출이다. 그러나 한-미 자유무역협정에선 소비·투자·정부지출과 직접 연결되는 고리를 찾기 힘들다. 그래서 정부는 ‘동태적 자본축적모형’이라는 기법을 동원한다. 이 기법을 적용하면 경제 전반의 큰 이익이 뚝딱 발생한다. 정부 스스로 큰 타격을 예상하는 서비스산업도 좋아지는 것으로 나온다. 10년간 일자리 창출 기여치 35만개 가운데 27만개가 서비스업에서 나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기대치가 나오려면 몇 가지 종교적 주문을 불어넣어야 한다. 개방 지상주의, 시장 만능주의라는 주문이다. 미국의 법과 제도 도입을 무조건 선진화라고 한다. 이런 주문을 외는 데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앞장섰다. “경쟁력을 높이고 싶으면 개방해야 한다. 많은 나라가 그런 정책을 취하면서 성장을 이뤄왔다.” 얼마 전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가 마련한 끝장토론회에서 나온 김 본부장 발언의 한 대목이다.
개방과 시장화가 경제성장을 촉진한다는 논리는 거의 이데올로기다. 현실과 어긋날 때가 많다는 얘기다. 특히 서비스업 같은 경우가 그렇다. 1996년 정부가 단행한 유통산업 개방조처의 성과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1990~95년에 연평균 7.6%였던 도소매업의 경제성장 기여율은 2000년대 들어 1.7% 선으로 추락했다. 국내외 대기업의 도소매업 진출로 일자리가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정부가 주장했으나 지난해까지 오히려 29만개가 줄었다. 섣부른 개방 조처가 영세 중소상인의 몰락만 재촉한 탓이다.
자유무역협정을 통한 미국 제도의 수입을 선진화라고 하는 논리는 근거가 더 비현실적이다. 오히려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으로 시작된 전세계 금융위기의 현실을 외면하는 주장이다. 첨단 금융서비스의 산실로 군림해온 미국 뉴욕 월가는 경제를 말아먹은 주범으로 몰려 지금 세계적 공분을 사고 있다.
미국의 의료제도에 대한 국제사회의 평가는 또 어떤가. 비인간적일 뿐 아니라 고비용·저효율로 전체 산업 경쟁력까지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꼽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를 보면, 2009년 미국의 국내총생산에서 국민 의료비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18%로, 영국(9%)이나 프랑스·독일(11%)보다 월등히 높다. 그럼에도 유아 사망률이나 암환자 사망률 등 의료서비스의 성과를 보여주는 지표에선 미국이 한참 뒤떨어진다. 세계 최강의 제약산업과 최대 의료보험시장을 보유한 나라의 후진적 현실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불러올 세상을 그려보면서 끔찍하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sb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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