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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홍세화칼럼] 거대한 ‘도가니’ 속 이 땅의 노동자들

등록 2011-10-26 19:04수정 2018-05-11 16:16

홍세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
홍세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
영화 <도가니>는 자기방어의 힘이 없는 장애 아동들의 기본인권이 검·경찰, 사법부와 종교인들의 방조 아래 얼마나 처참하게 유린당하였는지 폭로했다. 특히 미성년 장애인들에 대한 엽기적인 성폭행 장면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고 관객은 분노했다. 영화 도가니는 사회에 충격을 주면서 정치권과 언론을 움직이게 했다. 충격적인 일은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여져야 마땅하며, 영화 도가니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러한 반응은 만시지탄 속에 다행스런 일이다.

이 땅의 노동자들 또한 거대한 도가니 속에 있다. 300일 가까이 85호 크레인에서 농성중인 김진숙씨나 최근 노동자 자신이나 가족 중 17번째로 세상을 등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처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점점 익숙해지고 있는 것일까? 나 자신 ‘별일 없이’ 사는 게 아닌가 싶어 깜짝 놀라기도 한다. 가령 1400일 넘게 싸우고 있는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 노동자들의 처지는 어떤가? 노동자를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는 법 아래의 ‘법치주의’에 의해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노동자들이 힘겹게 싸워 획득한 노동기본권이라는 자기방어력마저 상실한 채 마지막 안간힘까지 동원해 싸워야 한다. 사측에 의해 치밀하게 기획되고 실행된 노동조합 파괴와 해고에 맞선 온갖 투쟁, 단식투쟁, 삭발투쟁, 천막농성투쟁, 일인시위…. 그렇게 1400여일이 지났다. 되돌아오는 게 ‘월급 560원’뿐이라면 차라리 다행이다. 용역들의 폭력에 시달린 몸에 가압류로 삶 자체를 옥죈다. 많은 사람들에겐 내가 그 안에 있지 않아 다행인 도가니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오늘도 학습지 노동자들은 무관심 속에 길거리에 서 있다.

네거티브로 가득 찬 서울시장 선거 열기가 식기 시작할 내일(10월28일)은 한국반도체산업협회가 지정한 제4회 ‘반도체의 날’이라고 한다. 한국 첨단산업의 ‘쌀’이라고 불리는 반도체를 찬양하고 자본가들에게 엄청난 이윤을 만들어준 반도체 산업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공로상을 주고 지난 1년 동안의 성장을 자축하는 자리라고 한다. 자본과 권력에 ‘산업전사’와 ‘노동자’의 차이는 뚜렷해, 과거에는 ‘산업전사’에게 표창장도 나눠주었지만 오늘 ‘반도체 노동자’들은 초대도 받지 못한다.

지금 이 시간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반도체 칩 검사 업무를 했던 이윤정(1980년생)씨가 사경을 헤매고 있다. 작년 5월 악성 뇌종양이 발병하여 시한부 선고를 받았는데 이젠 더 이상 치료가 무의미하다는 의사 진단을 받은 상태에서 눈도 뜨지 못한 채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있다고 한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에 따르면, 2007년 3월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생산직 노동자 황유미씨가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지금까지 직업병에 시달리면서 가족들의 삶과 함께 파괴되어간 노동자가 150여명에 이르고, 50여명의 노동자가 이미 목숨을 잃었다. 반도체 산업자본이 ‘반도체의 날’을 기념할 때 반도체 노동자들은 오로지 죽음으로써만 자신들이 처한 ‘도가니’의 현실을 사회에 고발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우리가 10월28일을 ‘반도체의 날’이 아닌 ‘반도체 노동자의 날’로 선언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돈이나 자본이 있기 전에 인간과 노동자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자유를 지향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라고 했다. 우리 몸이 자리하는 곳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함께 참된 자유를 누릴 때 우리는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 우리가 개인 또는 가족의 편익만을 추구하여 배움터인 학교와 일터인 노동 현장에서 굴종을 학습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를 속박하는 비인간적인 도가니는 1:99의 사회를 굳히면서 더욱 강력해질 것이다.

(이 칼럼을 마지막으로 한겨레 독자와 작별합니다. 누구 말처럼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오르려니 12년 반 동안 써온 한겨레칼럼과도 헤어져야 합니다. 제게는 실로 어려운 칼럼 쓰기였는데 그럼에도 행복했습니다. 그동안 변변치 못한 칼럼을 열독해주신 한겨레 독자분들께 감사와 연대의 인사를 드립니다.)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

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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