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식 논설위원
맘에 들지 않는다고 상대의 말을
중도에 무질러버리는 대화법은
대화법이 아니다
중도에 무질러버리는 대화법은
대화법이 아니다
여론분석가이며 문화연구자인 김헌태씨는 박근혜 의원의 공식 홈페이지와 미니홈피의 사진들을 낱낱이 살폈다. 미니홈피의 온라인 사진첩에는 박 의원의 어렸을 때 모습, 어머니 육영수씨의 모습, 동생 박지만씨 가족, 그리고 길렀던 강아지들이 단골손님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진은 한 장도 없다. 온 가족이 함께 찍은 가족사진은 있을 법한데 그것도 없다. 대신에 어머니 육영수씨의 사진은 곳곳에 보인다. 자택 거실에 자리잡고 있는 것도 아버지가 아니라 엷은 웃음을 머금은 육영수씨의 사진이다.
김헌태씨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는 것과 달리 육씨에 대한 비판의 화살은 많지 않다는 점에 주목했다. 즉 박정희가 여전히 논란의 한복판에 서 있는 반면에 어머니 육영수가 차지하는 의미의 영역은 현대사를 둘러싼 다양한 정치적 담론들이 ‘휴전하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박 의원에게 어머니는 자신이 돌아가고 싶고 보여주고 싶은 ‘행복의 공간’일 것이라고 김씨는 해석했다.(김씨 등 다섯 명의 여론 연구자가 함께 낸 책 <박근혜 현상>)
이 분석은 박 의원의 인기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즉 논란이 많은 박 전 대통령보다도 ‘자애로운 육영수’ 이미지가 박 의원한테 매우 힘있는 상징자본이 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박 의원의 미니홈피 사진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원한 목련꽃 육 여사” “영원한 목련꽃 근혜님” 등의 댓글도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그런데 최근 박 의원이 영 다른 모습들을 보였다. 얼마 전에 그는 기자들이 안철수 바람에 대한 소감을 묻자 “병 걸리셨어요?”라고 말을 중도에서 무질러버렸다. 또 얼마 전 동생 박지만씨가 저축은행 비리에 연루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어났을 때는 “본인이 확실히 (아니라고) 밝혔으니 그걸로 끝난 것”이라고 잘랐다.
한나라당의 한 중진 의원 설명을 들어보면 박 의원은 공격적인 질문을 넉넉하게 받아넘기지 못하는 태도를 오래전부터 드러냈다. 실제로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토론에서 경쟁자가 영국의 대처 총리를 실패한 지도자로 규정하고 견해를 묻자 박 의원이 “참 고약한 말씀이네요”라고 잘라, 듣는 이를 무안하게 한 일이 있다. 한나라당 출입기자들은 박 의원이 기자한테 뜻밖에 거북한 질문을 받았을 때 말을 끊고 상대방을 째려봐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기도 한다고 전한다.
이런 태도는 아마도 박 의원이 오랫동안 높은 위치에 홀로 우뚝 서서 지내고 있다는 점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는 누구하고도 수평적인 관계로 스스럼없이 허물어지듯이 어울리는 모습을 보인 바 없다. 18년 동안 절대권력을 휘두른 박 전 대통령이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살았을 것이다. 박 의원이 홀로 사는 여자인 까닭에 마구 어울리는 데 불리하다는 점은 이해해주자. 아무튼 그의 태도를 ‘여자 박정희’의 그것이라고 부를 이유는 충분하다.
정치언어의 출발점은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다. 그리고 회피하지 말고 말을 얼버무리지도 말고 책임 있게 제기된 상황에 응답해야 한다. 자기한테 불리한 질문이라고 아예 벽을 치고 말문을 가로막아버리는 것은 결코 민주적으로 소통하는 자세가 아니다.
한편으로 자애로운 육영수의 품에 파묻히길 꿈꾸면서, 다른 한편으로 ‘여자 박정희’의 야멸찬 모습을 지녔다는 점이 그 자체로 이상한 일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복잡한 존재다. 하지만 정치 지도자이든 아니든 말이란 주고받아야 재미있는 법이다. 맘에 안 든다고 무질러버리는 ‘여자 박정희’ 대화법으로 상대방을 질리게 하면 되겠는가. 그건 좀 그렇다.
cspcsp@hani.co.kr
cspcsp@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