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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농사가 도박인가? / 김현대

등록 2011-09-18 19:24

김현대 사회2부 선임기자
김현대 사회2부 선임기자
땀흘린 만큼 거두고
그래서 농사가 가장
정직하다고 했는데,
이젠 아닌 모양이다
충남 당진의 농부 안병석씨는 올해 농사를 망쳤다. 비가 너무 많이 내린 탓이다. 임차한 간척지는 습지로 변해, 씨를 뿌려보지도 못했다. 집 앞 물빠짐이 좋은 땅을 골라 정성껏 고추를 심었지만, 탄저병에 전멸했다. 이 와중에 충북 괴산의 한 농부는 하우스 재배라는 ‘고추 도박’으로 큰돈을 벌었다. 2만㎡의 하우스에서 비 피해를 피했고, 덕분에 가격폭등의 과실을 한껏 누릴 수 있었다.

사상 최대 구제역으로 전국의 양돈농가들은 심한 피해를 입었다. 돼지를 땅에 묻고 반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 농장을 다시 시작하지 못한 곳이 많고, 보상금을 받았다지만 손해를 메우기엔 태부족이다. 하지만 구제역 태풍을 용케 피한 호남·제주 등지의 농가들은 돼지고기값 급등으로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을 누렸다.

얼마 전에는 낙농가들이 납품가격을 올려달라고 원유 공급을 중단하는 소동을 겪었다. 따지고 보면 국제 곡물값 급등이 발단이었다. 수입 곡물로 생산되는 사료 값이 30% 이상 올랐는데, 우유 납품가격을 3년째 묶어놓았으니 낙농가들이 들고일어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지난해에만 500여 낙농가가 폐업 신고를 했다. 초지가 거의 없는 우리나라 낙농산업은, 사료값이 생산비의 70~80%를 차지하는 고비용 구조이고 국제 곡물값 등락에 그대로 노출돼 있는 위험산업이다.

언제부터 농사가 도박이 됐는가? 땀흘려 일한 만큼 거둬들이고 그래서 농사가 가장 정직하다고 했는데, 이제는 아닌 모양이다. 기후변화나 가축질병 또는 국제 곡물값에서 일이 벌어지면, 1년 농사 꼼짝없이 포기해야 하는 세상이 됐다. 하늘만 바라보고 천수답 농사를 짓던 시절로 되돌아가는 느낌이다. 안타까운 노릇이다. 정부까지 농산물 수입에 직접 나서면서, 농사의 예측가능성을 더욱 떨어뜨리고 있다. 이런 판에 이마트 같은 유통대기업들은 농민들을 상대로 인정사정없는 가격 후려치기에 나서기 일쑤이다.

최근에 여러 선진국의 농업과 협동조합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거기에서 얻은 결론은 두가지다. 선진국의 농사는 여전히 땀흘린 만큼 보상받는 정직한 생업이고, 협동조합이 농민의 정직한 소득을 보장하는 최선의 장치라는 것이다.

뉴질랜드에서 만난 70대 농부 에릭 레이는 평생 소젖 짜는 일로 여섯 자녀를 출가시켰다. 농장 깨끗하게 관리하고 우유 품질 잘 유지하는 게 자신의 일이고, 우유 수집과 가공 및 수출은 모두 협동조합기업 폰테라(Fonterra)가 책임진다. 폰테라는 강력한 브랜드로 전세계 시장 개척에 나서고, 낙농가들이 100% 지분을 갖고 있으니 납품가격을 후려칠 이유도 없다.

키위를 수출하는 협동조합기업 제스프리 또한 2700여 생산농가들이 100%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농민들은 세계 제1의 키위 브랜드인 제스프리가 정해준 ‘스펙’에 맞춰 최상품을 생산하고, 그만큼 알찬 수입을 얻는다. 경쟁국인 이탈리아나 칠레의 농가보다 50% 이상 높은 가격을 보장받고 있다. 폰테라와 제스프리는 기후변화와 각종 질병에 대응하고 국제가격 변동을 완충하는 구실도 당연히 맡는다. 폰테라와 제스프리가 농가소득을 잘 보장할 수 있도록 뉴질랜드 정부는 수출독점권이란 큰 힘을 보태주었다.

뉴질랜드에 폰테라와 제스프리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농협이 있다. 하지만 시장을 장악하는 힘도, 농가소득을 떠받치는 구실도 기대치에 훨씬 못미친다. 영농 후계자를 양성하는 국립 한국농수산대학에서는 협동조합을 가르치지도 않는다. 유엔이 정한 내년 세계협동조합의 해에는 이런 구호가 퍼지기를 기대한다. “정의로운 농업은 협동조합에서 시작한다.”


koala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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