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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홍세화칼럼] 곽노현 교육감의 진실

등록 2011-09-14 19:22수정 2018-05-11 16:16

홍세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
홍세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
프랑스 대학입학자격시험(바칼로레아)에 철학 과목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신이 없다면 인간의 모든 행위가 용인되는가?” “예술가는 실정법을 어겨도 되는가?” “국가는 개인의 적인가?” 등의 물음에 자기 생각을 펴도록 요구받는다. 10여년 전에 소르본대학 교수들에게 수험생들과 똑같은 조건에서 철학 시험을 치르게 했는데 평균 12/20점이 나왔다고 한다. 합격선인 10/20점을 가까스로 넘긴 그만큼 대학교수의 체면을 세웠다고 할 수 있는데 7/20점을 받은 교수도 있었다.

인문사회과학도는 물론 자연과학도들에게도 철학을 필수과목으로 요구하는 프랑스 교육을 부러워하는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사회구성원들에게 철학적 소양을 갖도록 한다는 점만으로도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하다. 여기에 내가 한 가지 더 주목하는 게 있다. 철학 공부의 경험이 주체성 형성을 바탕으로 각자에게 인간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끌어올리도록 작용하리라는 점이다. 칭찬받은 학생이 자기 능력을 뛰어넘어 노력한다는 것은 정설의 하나인데, 고등학생에게 위에 예로 든 물음을 던지는 것 자체가 그들 수준에 비추어 칭찬의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적으로 칭찬받은 그들은 그 수준을 지키기 위해 세상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것을 알더라도 그 세상에 타협하기보다 조금은 더 긴장을 유지하리라는 것이다.

불현듯 프랑스의 철학 교육에 관한 생각이 머리를 스친 건 “사실과 달리 진실은 인격적이고 규범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은 고해의 대상이지 공방의 대상이 아니라고 믿습니다”로 시작되는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의 영장실질심사 최후진술문을 읽을 때였다. 추석 연휴 직전 결국 그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최후진술문에 담긴 그의 진실성은 증거인멸의 위험이라는 법리 앞에서 무릎 꿇어야 했고 그는 철창에 갇히고 말았다.

우리는 ‘철든다’는 말의 속살인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세상에 익숙해지’면서 이미 많은 걸 포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서로를 인간적인 본디 가치보다 추어올려 주기는커녕 그 자체로 보려고도 하지 않고 깎아내리는 쪽에 익숙해져 있는 게 아닐까. 곽 교육감이 후보 단일화 상대였던 박명기 교수에게 2억원을 주었다는 소식을 들은 진보진영 인사들 중에도 모든 진실을 알려고 노력하기에 앞서 그에 대한 평가부터 내린 사람이 적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라고 묻기 전에 “그 사람도 별수 없군”이라는 식의, 인간적 가치에 대한 하향평준화 시각이 지배하는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이다. 다른 한편, 독실한 기독교도의 ‘긴급부조’라는 ‘선의’를 선의 그대로 믿을 만한 독실한 기독교도도 선의를 가진 사람도 드문 우리 사회를 반영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렇게 인간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곳에서 고결한 인격은 형성되기 어렵다. 고결한 인격은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실로 어려운 성숙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서로의 인간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사회에서는 중도에 포기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고결한 인격이 없는 곳에서 고결한 판결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 또한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를 평가하거나 단죄하는 우리 사회의 질량의 10분의 1이라도 돈 없는 사람은 피선거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현행 선거제도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다면 그는 조금은 덜 ‘사회적 죄인’이 될 것이다. 그에 대한 평가와 단죄가 모든 국민에게 열려 있다는 피선거권이 실제로는 가진 자만의 권리이며 기득권자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또 하나의 진실을 가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모처럼 시작된 교육혁신의 바람이 물거품이 되지 않기 위해서도 곽노현의 진실은 우리 사회에 그 본모습 그대로 드러나야 한다. 진영 논리도, 인간의 가치를 하향평준화로 바라보는 시각도, 선입관도 모두 버리고 오로지 진실을 봐야 한다. 그의 인신이 구속되었다는 이유로 그의 교육혁신의 소명까지 구속시킬 수 없듯이 그의 진실까지 구속시켜선 안 되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결국 승리하는 것은 진실이기 때문에.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

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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