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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어떤 여정 / 황선미

등록 2011-08-12 19:23

황선미 동화작가
황선미 동화작가
이 여름, 준사막에 가까운 대륙을
내달리는데 에어컨 고장이라니
그러나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었다
방학은 내게 중요하다. 독서하고 집필하고 좀 멀리 여행도 할 수 있는 시간. 나는 정신 말짱하고 두 다리 튼튼할 때 멀고 어려운 곳부터 봐두고자 한다. 남북극, 독도, 아프리카, 빙하, 오로라 체험, 수목한계선 이상 올라가기 등등.

옐로스톤은 그중 하나였다. 이상기온과 관광객 때문에 훼손이 심해져 휴식년에 들어갈 수도 있다니 더 늦기 전에 가보고 싶었다. 재개장까지 백년이 걸릴지도 모른다나. 우리가 상상하는 자연은 어떤 것일까. 그게 무엇이든 옐로스톤은 우리 상상 너머에 있는 게 분명하다.

마지막 빙하시대부터 유지돼 온 자연환경이라는 지구 최대의 국립공원. 영하 40도 이하 극단의 추위가 5개월 이상 지속되고, 자연의 힘만으로 지배되는 원시 지구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말만으로도 가슴이 뛰는 곳. 지표면 5㎞ 밑에 엄청난 규모의 마그마가 끓고 있어서 이것이 터지면 미국의 반이 화산재로 뒤덮인다는 곳. 그곳에 발 들이는 하루를 위해서 오고 가고 나흘을 허비해야 하는 여정. 괜찮은 방법이 더 있겠지만 나로서는 4박5일 패키지여행도 감지덕지였다. 그런데 이나마도 사치였을까.

4500㎞를 달려야 할 버스가 최악이었다. 내부에 딸린 화장실 악취에 그걸 처리한답시고 뿌린 약 냄새까지 더해져 숨쉬기가 고역이었다. 버스 교체를 요구하며 항의했으나 결국 소용이 없어 어떤 이는 여행을 포기했고, 포기가 안 되는 나 같은 사람들은 하루만 참아달라는 말을 믿고 출발했다. 냄새는 차츰 나아졌는데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이 여름, 준사막에 가까운 대륙을 내달리는데 에어컨 고장이라니. 버스 교체가 불가능하다 싶을 만치 우리는 너무 멀리 와 있었고, 천장의 환기구를 열어놓고 더위를 견디며 앞으로 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었다.

남은 시간이 막막했다. 이 환경이 산뜻하게 바뀔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여행을 망치고 말았다. 돌아가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리라. 그런데 기막히게도 문제가 또 생겼다. 덜걱대던 운전석 옆 창문이 떨어져버린 것이다. 사고로 이어질 위기. 여태껏 괜찮다고 큰소리쳐 온 기사가 어딘가로 전화를 해대고, 자기 자랑에 열 올리던 가이드는 무책임하게도 입을 다물어버렸다.

가까운 주유소에 차를 대고 비상조처를 하는데 왕년에 자동차 정비사였다는 노인이 나섰다. 사다리를 붙잡아주는 손, 자리를 바꾸어가며 앉는 사람들, 서로 배려하고 먹을 걸 나누는 인심.

파란만장하게 여행을 마쳤다. 그런데 앞자리에 조용히 앉아만 있던 노인이 먼저 운전자에게 악수를 청하는 게 아닌가. 제법 나이가 든 운전자에게 노인은 수고했다고 말했다. 억울한 걸 따져도 시원찮은 판에. 그런데 나이 든 어른들이 다 그렇게 인사하며 헤어지는 게 아닌가. 거기에 운전자까지 친구와 헤어지듯 손을 흔들어주고 이마의 땀을 훔친다. 노인이 되면 내 아량도 저리될까.

바퀴가 제각각으로 보일 만큼 낡은 버스에 열세 살 소년부터 여든이 넘은 노부부까지 탔었다. 그야말로 뼈마디 삐걱대는 늙은 버스와 함께한 마흔한 명. 자기 베개까지 챙겨온 천식환자부터 인생이 참 재미있다고 말하는 소년, 그 더위에도 손이 차가웠던 노부부. 대학원 진학 전에 부모와 마지막 여행을 온 젊은이들. 해를 마주하고 달리느라 땀범벅이었던 운전자까지 우리는 한 배를 탄 공동운명체였다. 문명의 편리가 당연하지 않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던 여정.


어쩌면 내 여행은 그리 실패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점점 더워지는 지구와 우리 운명도 어느 날 이렇게 되는 건 아닐까. 그나마 견디게끔 숨통 틔워준 버스 환기구가 아마존이나 옐로스톤이라면. 우리에게 그마저도 없어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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