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식 논설위원
한국 정치는 미국의 엉덩이를
걷어차 줘야 한다는 국제 여론과
따로 놀고 있다
걷어차 줘야 한다는 국제 여론과
따로 놀고 있다
“미국에 대한 믿음을 떨어뜨리는 것은 재정적인 숫자가 아니라 정치다. 우리의 문제는 극단적인 우익의 부상으로 비롯됐으며 이들은 반복적으로 위기를 불러올 준비를 하고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는 며칠 전 <뉴욕 타임스> 칼럼에서 미국발 금융위기의 배경을 이렇게 압축했다. 문제의 구조는 간단하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증세와 복지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병’을 고치려고 했다. 여유 있는 부자들한테서 돈을 걷어 서민들한테 온기가 돌아가도록 하고 재정 적자도 줄이자는 상식적인 처방이다. 하원을 장악한 티파티 계열 공화당 강경파는 국가부도를 위협하며 발목을 잡았다. 그 결과 백악관과 의회는 ‘부자 증세 없는 긴축’으로 타협했으나 그건 해법이 될 수 없음을 시장이 경고하고 나선 게 이번 사태의 본질이다.
세계 각국도 워싱턴의 ‘정치 실패’를 비난하고 나섰다. 미국 때문에 세계가 공포와 혼돈에 휩싸이는 게 벌써 몇 번째인가. 분노와 짜증이 일어나는 건 당연하다. 중국 관영 언론인 <환구시보>는 “세계는 미국의 엉덩이를 걷어차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는 “미국은 세계 경제의 기생충”이라고 비난했다. 푸틴은 미국이 능력 범위를 넘는 빚잔치를 벌여 다른 나라 경제에 주름살을 가져온다는 점을 짚었다. 이들한테도 자국의 이익을 지키려는 나름의 속셈이 있겠지만, 더욱 중요한 점은 워싱턴의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그제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나온 그리스 학자 인터뷰를 인용하면서 ‘그리스가 1970년대 이후 고도성장과 민주화를 거쳐서 복지를 확대한 결과 경제위기를 맞았다’고 주장했다. 이어 “선거를 치르는 사람은 오늘이 당장 급한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제대로 가도록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정치권의 복지 담론을 비난했다.
이건 워싱턴의 교훈을 정반대로 호도하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종합부동산세와 소득세 등 대기업과 부유층에 혜택이 돌아가는 ‘부자 감세’를 했다. 그 결과 세수가 줄고 재정 적자는 늘어났다. 게다가 일부 토건업계에만 혜택이 돌아가고 고용 효과도 전혀 없는 4대강 사업에 22조원의 헛돈을 쏟아부었다. 부자 감세를 유지하면서 천문학적인 돈을 전쟁비용에 쏟아부어 온 미국병의 구조와 엠비노믹스가 너무도 닮았다. 이번 미국발 금융위기를 보고 이 대통령이 성찰할 점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그가 부자 감세를 철회하고 사회안전망을 넓히자는 정치권의 복지 담론을 비난하고 있으니 엉뚱하다는 느낌밖에 안 든다.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는 이임하는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대사를 만나 “에프티에이가 한국에서 무사히 통과되면 좋을 텐데 야당의 일부 반미주의자들의 책동 때문에 지연돼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비준안의 조속한 국회 처리를 다짐했다. 스티븐스는 “홍 대표의 말을 들으니 (비준이) 더 가까이 왔다고 생각돼 더욱더 고무적”이라고 화답했다. 한-미 에프티에이는 두 나라 금융 체계를 사실상 하나로 통합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협정이 시행되면 지금 같은 상황에서 휘둘리는 진폭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 뒤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를 겪고, 한-미 에프티에이 체결에 성급한 대목이 있었음을 성찰한 것도 이런 측면 때문이다.
하필 이럴 때 집권당 대표가 미국 대사를 붙들고 한-미 에프티에이를 처리하겠다며 기염을 토할 건 또 뭔가. 금융 혼란으로 손실을 입은 투자자들의 심정을 살피고, 우리 경제의 안전판 강화 방안을 고민해도 부족한 때인데 말이다. 워싱턴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야기라면 눈감고 좇는 듯한 모습이 보기에 딱하다. cspcs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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