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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불 꺼진 창 / 하성란

등록 2011-07-22 19:10

하성란 소설가
하성란 소설가
“파토스가 없는 인생이라는 것은
그저 단백질 덩어리에 불과하다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하라”
지난봄, 선배들과 중국에 다녀왔다. 역시 중국은 광활했다. 가도 가도 목적지가 나타나지 않았다. 한 도시에서 다음 도시로의 여정은 짧아야 오백 킬로미터, 서울~부산 거리를 달려가 경승지를 둘러보고 식사를 한 뒤 다음 도시로 출발하는 일정이 계속되었다. 하루종일 버스가 쉬지 않고 달린 거리래야 중국 전체 국토를 놓고 보자면 크게 표시날 거리도 아니었다. 풍광은 엇비슷해서 잠깐 졸다 깨면 버스가 같은 곳을 헤매고 있는 건 아닐까, 라는 착각이 들었다. 비행기를 타고 이륙해 저 아래 펼쳐지는 장난감 같은 건물과 자동차 들을 내려다볼 때처럼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야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통로를 사이에 두고 옆자리에 앉은 그 선배도 내내 그런 표정이었다. 조금은 담담하게 조금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시간을 내기 어려운 선배들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였다. 그 많은 선배들과 이렇듯 긴 시간을 보내기는 처음이었다. 십여년 전 그들과 보낸 시간이 떠올랐다. 지금의 모습이 그 시절과 대비되어 깜짝 놀란다. 흰 머리가 섞이고 머리카락 숱도 줄었다. 짐을 꺼내려 일어설 때마다 앞칸에 앉은 선배들의 드러난 정수리가 보인다. 예전의 날램은 어디로 가고 무릎이 구부정해졌다. 짧은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귀도 예전과 다르다. 반질반질하고 날 서 보이던 귀가 주름도 잡히고 날도 무뎌졌다. 선배들의 눈에 비친 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환한 대낮, 눈가와 이마의 잔주름은 진작에 들키고도 남았다.

그 선배와는 관광지 곳곳에서 툭툭 마주쳤다. 그는 일행과는 조금 떨어져 느릿느릿 걸었다. 이미 몇번 와본 곳인 듯 주변을 휘 둘러볼 따름이었다. 어쩌다 그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의 눈이 불 꺼진 창 같았다. 일말의 호기심도 일말의 기대감도 없는 그는 너무도 낯설었다. 예전 그의 얼굴 속에서는 개구쟁이 적 모습이 보였다. 바쁜 시간을 쪼개 여행을 떠나고 자신의 꿈에 주저없이 뛰어들었다. 격조했던 지난 몇년 사이,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빡빡한 일정에 모두 지쳤다. 숙소에 도착하면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숙소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트렁크를 끌려는데, 옆에 선 누군가의 트렁크와 바퀴가 얽혀 꼼짝하지 않았다. 바로 그 선배였다. 먼저 들어가라는 양보도 없이,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멋쩍을 때면 소리 없이 씩 웃던 그 웃음조차도 없이, 그는 아무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단지 자신의 트렁크를 당겨 엘리베이터로 올라가느라 바빴다. 사려 깊던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여행은 끝났고 그 뒤로 선배를 볼 일은 없었다. 하지만 불 꺼진 창 같던 그의 눈은 잊히지 않았다.

생전의 강원용 목사님을 딱 한번 뵌 적이 있었다. 팔순을 한참 넘긴 목사님은 한참 어린 후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성심성의껏 말씀하셨다. 그분의 말씀은 늘 이런 식으로 시작되었다. 1965년 4월 오후 두시…. 이야기는 생동감이 흘러넘쳤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파토스가 없는 인생이라는 것은 그저 단백질 덩어리에 불과한 것이다. 열정을 가지고 한번 태어나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하라. 종교인으로서 자신의 속에서 불꽃처럼 일렁이던 파토스(충동·정열)와 부단히 밀고당기기를 하셨을 목사님의 얼굴이 그 선배의 얼굴과 교차되었다.

그 무엇이 선배 속에 있던 그 불씨를 꺼뜨린 것일까. 물리적인 시간, 일에 대한 스트레스? 아니면 커다란 상심일까. 한 아내의 남편이고 아이들의 아버지인 그의 모습을 떠올리면 서글퍼진다. 선배여, 힘내시길. 타올라라,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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