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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홍세화칼럼] 민주공화국의 시민을 위해

등록 2011-06-20 19:19수정 2018-05-11 16:15

홍세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
홍세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
“광신자들이 열성을 부리는 것도 수치스런 일이지만, 지혜 있는 사람이 열의를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수치스런 일이다.” 다시금 볼테르의 말이 다가온다. 사익추구자와 극단주의자에겐 광신자에 버금가는 열성이 있기 때문이리라. 무상급식 반대를 시정의 으뜸으로 알고 있는 듯한 오세훈 서울시장이 앞장선 ‘복지포퓰리즘’ 추방 국민운동본부가 80만이 넘는 시민의 서명을 받았다고 한다. 반면에 차별과 폭력이 없는 학교를 만들자는 서울학생인권조례 주민 발의는 8만5000명의 참여로 발의 요건을 가까스로 충족시켰는가 싶었는데 중복이나 주민번호 오류, 비거주자 서명 등으로 1만4000명의 서명이 무효 처리되어 무산될 위기에 있다. 마지막 희망은 보정기간으로 주어진 6월22일부터 26일까지 5일 동안 1만5000명의 서명을 받을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80만과 8만 사이. 동원된 숫자냐, 자발적 참여냐를 구분해야겠지만 열 배 차이를 감출 수 없다. 이를테면 우리는 학생들을 위한 무상급식에 반대하는 서명자는 쉽게 80만을 넘기는데 학생들의 인권을 위해서는 8만의 서명을 받기도 힘든 사회를 살고 있는 셈이다. 이런 사회를 다음 세대에 넘겨주는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 부끄러움이 앞서는데,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 부끄럽다는 말 하나로 정리하고 넘길 수는 없는 일이다. 오히려 학생인권조례 주민 발의를 기어이 성사시키고 말겠다는 의지를 불러 세운다. 투표권이 없지만 5일 동안 다시금 길거리 서명에 나설 청소년들 옆에서 함께 외치려 한다. “차별과 폭력 없는 행복한 학교, 함께 만들어요!” “가장 인권적인 것이 가장 교육적입니다.”

가령 깨어난 시민의식은 어떻게 형성될까? 데카르트의 말처럼 우리는 생각하는 존재이지만 생각을 갖고 태어나진 않는다. 은유컨대, ‘생각의 주머니’를 차고 세상에 나온다고 할 수 있다. 태어날 때 비어 있던 생각의 주머니를 어떻게 채우는가에 따라 기존 체제와 질서에 순응하는 노예의식 또는 주체적인 시민의식을 형성한다. 그렇다면 우리 학교는 학생들의 생각의 주머니에 어떤 생각을 주로 채우는 곳일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지만 대한민국의 학교가 민주공화국의 학교인 적은 이제껏 없었다. 학생들의 “생각의 주머니” 안에 민주공화국의 구성원답게 민주의식을 형성하도록 해야 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적이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학생회, 교사회가 법제화되어 학생과 교사가 학교 운영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이른바 관리자들의 관리 대상으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 점은 자유주의 세력의 ‘민주’정권 10년을 거치면서도 바뀌지 않았다. 학교는 군국주의 일본 시절부터 굳건히 자리 잡힌 국가주의 교육을 통해 학생들의 ‘생각의 주머니’ 안에 자발적 복종의식을 주입하는 터로 기능했는데, 병영 모습을 본뜬 학교 구조나 교장 임용 제도가 거의 바뀌지 않은 만큼 지금도 거의 바뀌지 않았다.

학생도 사람이라면 학생인권은 누구도 거부될 수 없는 정언명령인데 21세기에 겨우 학생인권조례를 말하고 있을 만큼 만시지탄을 불러온 것은 무엇보다 학생들의 ‘생각의 주머니’ 안에 주로 기존 체제와 질서에 대한 순응의식을 심으려는 기득권 세력의 관성적 욕구 때문이다. ‘80만 : 8만’은 그 반영물의 하나이며 그들이 “학생에게 무슨 인권이냐?”라고 주장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이 얍삽한 인식은 대부분 학교 문제에 머물지 않고 가정문제, 사회문제이기도 한 청소년 문제를 모두 학교 문제로 가두면서 체벌이라는 폭력을 합리화하는 얄팍한 인식과 하나 되어 만난다.

모든 권리는 누리는 이에게 책임을 요구한다. 우리 학생들에게 책임의식이 부족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보다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 교육 목표의 하나인 자율성이 주체적 시민의 자격요건이라고 할 때, 인권을 누리지 못하는 학생은 결국 머릿수만 채우는 행정 대상으로서의 시민이 될 뿐이다. 마지막 5일…. 민주의식을 가진 서울시민들에게 다시금 www.sturightnow.net에 접속하는 열의를 기대한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

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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