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철 정치부장
어찌보면 척박한 우리 정치 풍토에서
상생적 대북정책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가늠자인지도 모른다
상생적 대북정책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가늠자인지도 모른다
북한민생인권법이 좌초할 모양새다. 애초 여야 원내대표들이 불쑥 꺼낼 때부터 미덥진 않았다. 북한 인민들의 민생도 지원하고 인권도 개선하자는 것인데,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겠다는 것 아닌가. 우리 정치 수준에선 ‘그림의 떡’이려니 했다.
이 법은 비록 아이디어 차원이긴 하지만, 여야가 합의에 기초한 대북정책을 시도한 매우 드문 사례다. 인도적 지원과 북한 인권 문제는 뿌리는 하나지만, 성격은 전연 딴판이다. 화해 불가능한 대북정책의 두 아이콘이라고나 할까. 아니나 다를까, 여권이 합의를 파기하고 북한인권법만을 단독처리하기로 하면서 이 법안은 사실상 빈사 상태에 빠졌다.
북한민생인권법 논의는 보수진영의 최근 대북정책 논의와 맥이 닿아 있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임기 말로 접어들면서 명분도 실리도 잃는 딜레마적 상황에 빠졌다. 이를 극복하려는 보수진영의 논의가 제법 활발하다.
한나라당의 권영세·남경필 의원 등은 대북정책에서 ‘제3의 길’을 일찌감치 브랜드화했다. 이명박 정부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 중 장점만을 취하자는 것인데, 어느 쪽에 방점이 찍혔는지 불분명하다. 박세일씨의 선진통일연합은 현 정부의 흡수통일 정책을 더욱 밀고 나갈 태세다. 우파 통일지상주의의 새 버전인 셈이다.
진보진영의 대북정책 논의는 상대적으로 일점화, 화석화하는 감이 있다. 대북정책에 관한 한 이명박 정부가 너무 아마추어인 탓일까, 현 정부와 반대로만 하면 된다고들 생각하는 모양이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이른바 ‘종북 문제’를 놓고 티격태격하는 것도 보기 딱하다. 백성들은 이미 답을 알고 있는데, 책상물림들끼리 해묵은 말다툼만 벌이는 꼴이다.
북한 행태를 보고 있노라면, 당장 흡수통일에 나서자는 보수 쪽 주장이 아주 틀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1인시위’ 같은 기이한 기차여행을 벌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 앳된 티를 벗지 못한 후계자의 3대 세습, 헐벗은 인민들…. 아무리 ‘내재적’으로 접근해도 북한이 정상국가에서 한참 먼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국의 보수는 북한 현실을 보면서 독일 통일 당시의 콜 총리와 집권 기민당이 되고 싶은지도 모른다. 하지만 독일 통일이 보수의 몫만은 아니었다. 빌리 브란트로부터 시작된 사민당의 오랜 동방정책이 통일의 원동력이었다는 건 잘 알려진 일이다. 통일이 우리 역사의 도정에 있다면, 그것은 보수와 진보라는 씨줄과 날줄이 엮어가는 한편의 서사시일 것이다.
내년 총선, 대선을 앞두고 여야 정치권에서 합리적 대북정책, 대북정책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길 기대한다. 북한민생인권법과 같은 난제를 여야가 슬기롭게 풀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두 진영의 매파들이 이 법안을 두고 ‘되지도 않을 잡탕’이라며 반발할 모습이 눈에 선하다. 북한민생인권법은 어찌보면 척박한 우리 정치풍토에서 상생적 대북정책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가늠자인지도 모른다.
내년 총선·대선 이후 들어설 이른바 ‘2013년 체제’의 대북정책 역시 단순한 과거회귀로는 곤란하다. 현실 적합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판명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도 문제지만, 과거로 돌아가자고만 하는 것도 상책은 아니다. 대북 포용정책도 세련되게 다듬으면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내년 양대 선거에선 여야가 국민 정서와 시대 상황에 맞는 합리적 대북정책을 앞다퉈 내놓고 경쟁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kcbae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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