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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농협의 새로운 리더십 / 김현대

등록 2011-04-26 20:16

김현대 지역부 선임기자
김현대 지역부 선임기자
지난 14일 오후 5시, 최원병 농협중앙회 회장이 기자들 앞에 섰다. 고개를 숙였다. 사상 초유의 전산사고가 일어난 이틀 뒤였다.

그날 낮, 기자회견의 일정과 형식을 놓고 농협의 핵심 간부들이 난상토론을 벌였다. 전산부문의 최고경영자인 이재관 전무가 나서야 한다는 의견과, 농협의 얼굴인 최 회장이 직접 대국민 사과를 해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결론은 최 회장이었다. 자칫 “회장은 어디 숨었느냐”는 비난이 일어날까, 두려웠다. 다음날 오전으로 예정됐던 일정도 급히 앞당겼다.

22일 오후 3시, 이번에는 이 전무가 기자들 앞에 섰다. 사의를 표명했다. “왜 회장이 아니냐”는 질문에, 책임질 사람은 전산 업무의 전권을 쥔 전무이사라고 답했다. 농협중앙회에서 회장은 ‘비상근’이고 ‘명예직’이라는 것이었다. 맞기는 맞는 말이다. 농협법 127조는, 회장이 농협을 대표하나 그 직무는 ‘회원과 조합원의 권익 증진을 위한 대외활동’ 하나에 국한한다고 못박고 있다. 전무 이외에 신용·농업경제·축산경제 대표들이 각 사업부문의 인사권을 포함한 최종 결재권을 갖는다.

그러나 이런 설명을 다 들어도 찝찝하기는 마찬가지다. “이거는 아닌데…”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최 회장은 지금도 거의 매일 서울 서소문 본관 11층의 회장실에 출근하고 있고, 각 사업부문의 인사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한다. 적어도 다수의 농협 직원들은 그렇게 알고 있고 믿고 있다. 최 회장은 기자회견장에서 전산담당자들을 직접 질책하고 지시하는, ‘실무대표’급의 가벼운 처신을 보이기도 했다. 이래서야, 권한은 누리고 책임은 지지 않는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농협은 사업구조 개편이라는, 격랑의 시대를 맞고 있다. 농협중앙회의 사업을 분리해, 그 아래에 금융지주와 경제지주를 설립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조합원의 농산물을 안정적으로 팔아주는 소임을 수행할 수 있도록 경제지주에는 3조~4조원대의 자본금을 공급한다. 금융지주에는 분리 독립의 날개를 달아준다.

하지만 이런 변화의 활시위가 약이 될지 독이 될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냉정하게 말하면,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죽을 것 같기 때문에 바꾸는 쪽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만큼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다.

자칫 농협의 정체성은 더 혼란스러워질 수 있을 것 같다. 상당수 농협 직원들은 협동조합이 뭔지, 벼와 보리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입사한다. 그저 좋은 은행으로 알고 들어온다. 새로 출범하는 금융지주가 협동조합과 어떻게 부합할 수 있을지, 공감대도 충분히 형성돼 있지 않다. 농협 내부에서조차 협동조합의 정체성을 뚜렷이 세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 신용협동조합인 프랑스의 크레디아그리콜, 네덜란드의 라보은행, 캐나다의 데자르댕 등은 그 나라의 여러 협동조합과 조합원들에게 혈액을 공급하는 심장 구실을 한다.

농협에 새로운 리더십이 요구된다. 출발은 명실상부한 ‘비상근’의 정착이다. 지역 조합장 출신의 선출직 회장은 대규모 경영의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다. 선거 과정에서 사람 빚도 많이 지게 된다. 회장이 인사권을 행사할수록 경영의 파행 가능성이 높아지는 구조이다.


‘비상근’ 회장의 더 중요한 역할은 농협의 정체성을 새롭게 세우는 일이다. 1171개 회원조합의 역량을 강화하는 일이다. 각 사업부문의 경영은 해당 대표들에게 맡기면 된다. 사면초가에 몰린 최 회장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이다. 버려야 한다.

그래야 자신도 살고 농협도 살 수 있다. 사즉생 생즉사(死卽生 生卽死)이다. 김현대 지역부 선임기자

koala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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