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의 35m 크레인에 오른 지 오늘로 105일째다. 8년 전 김주익 한진중 지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129일간의 농성을 마감한 바로 그 85호 크레인이다. 시사주간지 <한겨레21>은 지난호 표지에 그 앞 17호 타워크레인에 오른 문철상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장과 채길용 한진중 지회장의 모습을 담았다. 자본의 탐욕은 어디에서 멈출까. 또 노동유연성이 부족하여 고용창출이 어렵다는 그들의 말은 어디까지 진실일까. 한진중공업은 지난 20년 동안 단 한번도 적자를 내지 않았다는데 지난 2월14일 대규모 정리해고를 단행했고 직장폐쇄를 했다.
정리해고된 노동자들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겐 4월만 잔인한 달이 아니다. 방송사들이 상춘객들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전할 때, 거제에선 고압전류가 흐르는 철탑에 오른 강병재 대우조선 하청노동자조직위원회 의장이 “노동자의 삶이 자본가의 이윤보다 더 소중하다”고 외치고 있다. 노동자의 삶이 자본가의 이윤보다 더 소중하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 앞 상춘객인들 이를 모르기야 하겠는가. 그 밝은 표정들에 위화감 대신 무력감이 포개지는 건 나만의 일일까.
국가기관을 마음껏 유린한 삼성 권력 앞에서, 용산참사 앞에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나 재능교육을 비롯한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힘겨운 싸움 앞에서 무력감이 가슴에 젖어들 때마다 우리는 차라리 고개를 돌리고 침묵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편이 작은 실천도 하지 않은 채 대기업 정규직의 이기주의를 비난하기만 하는 것보다는 나을지 모른다.
하지만 무력감이 모든 걸 말해주는 것도 덮어주는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부족한 게 더 기본적이며 중요한 요인일 수 있다. 우리 모두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면 초중고 교육과정에 두루 있는 ‘사회’교과에서 가장 중요하게 공부할 것 중 하나가 자본주의인 게 분명한데, 공부한 게 거의 없다. 실제로, 자본주의의 역사, 노동운동의 역사, 노동과 자본의 모순관계,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의 권리 등에 관해 공부한 게 거의 없지 않은가.
사회구성원들이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는 점만 알고 있을 뿐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 자본(가)에 대한 자발적 복종에 있어서 이보다 더 좋은 토양은 없다. 그 인식의 부족에서 벗어나려고 ‘자본주의연구회’와 같은 동아리를 꾸려 공부하는 대학생들에게 국가보안법을 걸어 잡아가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왜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자본주의를 알면 안 될까? 왜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는 톱니바퀴로만 용인될까? 인간의 본성이 자유를 지향한다면 이 물음 앞에 성찰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리하여 우리는 적어도 ‘기업하기 좋은 나라’ 한국에서 ‘노동유연성’이라는 그럴듯한 말이 비정규직화, 정리해고와 똑같은 말이며, 사회안전망이 거의 없는 우리에게 그것은 찰스 디킨스나 에밀 졸라가 그린 19세기 자본주의 사회로의 퇴행을 가져올 뿐이라는 점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 강력한 관철은 자본주의 아래 세계 노동계급이 적어도 200년 동안 노동운동, 사회투쟁을 통해 획득한 열매를 한꺼번에 짓뭉개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경각심이 부족했던 데에는 이른바 민주개혁세력이 이를 수용했다는 점도 작용했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유연성이라는 괴물을 물리칠 때까지 가슴마다 꿈틀대는 분노가 연대의 강이 되어 흘러야 한다. 그 출발이 무력감에서 벗어나는 데 있다면 외면하는 대신 직시하는 불편함을 택해야 한다. 타워크레인에 오른 노동자들과 작은 연대라도 꿋꿋이 실천하고 거리와 광장에서 싸우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다가가 그 외로운 손을 붙잡아야 한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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