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일남 소설가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1960년대 초기 신문에 비친 우리 4월은 늘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요 ‘가장 잔인한 달’이었다.
봄이 와도 꽃과 풀이 없는 나라(흉노)로 억지 출가한 왕소군의 비탄과 T. S. 엘리엇의 장시 <황무지> 가운데 한 줄을 빌려, 다 된 농사에 낫 들고 덤비듯 4·19를 망가뜨린 군사정권을 에둘러 비판했던 것이다. 아니, 말살된 언론자유 탓에 문학적 은유로 비감을 씹은 셈이다.
실로 억울하고 기막혔다. 일단 성공한 줄 알았던 4월혁명의 희생자 따로 있고, 가만히 구경만 하다가 숟가락을 들고 나서는 자 따로 있는 형국이었다. 역사는 때로 그런 농간에 휘둘려 초심을 잃기도 한다. 살아생전의 쑨원이 그토록 당부한 ‘혁명상미성공’(革命尙未成功) 생각이 났다.
하기야 어느 해는 이 강산 봄날이 얼싸절싸 흥겹기만 하던가. 태산보다 높다던 보릿고개를 넘기 바빴거늘, 한해 전 가을에는 또 사라호 태풍의 광란을 겪었다. 강토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는데, 이기붕씨의 서대문 집에는 그 와중에도 30명 안팎의 고관대작과 그 부인들이 날마다 드나들었다. 김진송씨의 <장미와 씨날코>(부제 ‘이기붕가의 선물 꾸러미’, 2006년 3월, 푸른역사)는 그 얘기로 가득하다.
1999년에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라는 책으로 많은 독자를 매혹시킨 저자는 이번에 다시 <상상 목공소>를 써냈다. 스스로 목수를 자처하되, 책날개에 소개된 미술평론가, 출판기획자, 문화연구가, 종합지식인의 타칭에 걸맞은 파격적인 글솜씨가 놀랍다.
1959년 1월4일부터 12월30일까지 꼬박 1년 동안 기록한 ‘내방인 명단’과 들고 온 물건이 볼만하다. 한 신문사의 서류함에서 발견한 자료라고 했는데, 저자는 책 제목으로 삼은 ‘씨날코’(Sinalco)가 무엇인지 몰랐다가 옛날 신문광고를 보고서야 새로 나온 고급 음료수임을 알았다. 나도 맛보지 못했다. 초등학교 때 일본 ‘칼피스’는 먹어봤다. ‘첫사랑의 맛’이라고 선전하던 쌀뜨물색 음료 말이다.
물품 목록은 막상 수수했다. 이를테면 5월31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33명의 손님이 가져온 선물은 화분, 쇠고기, 장미, 생선, 딸기 등등이었는데, 개중에는 내용을 밝히지 않은 ‘지포’(紙包) 1개, ‘지상자’(紙箱子) 1개가 자주 눈에 띄었다. 그것은 화폐 뭉치의 외피일까. 훗날 성행한 차떼기 정치자금의 종잣돈이었던 폭일까.
그리고 어느 날의 ‘노루 일필(一匹)’ 기록에 나는 특히 주목했다. 동물의 더운 피로 회춘을 노리던 전래의 단방(單方)이 얼핏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다가 모질고 악착스런 독재체제에 덜컥 멱살을 잡혔을지언정 신문은 자유와 희망의 단서를 발견하고자 기를 썼다. 그것도 경쟁이라고 졸업과 입학식의 총장 식사를 미리 알아내어 색다른 표현과 행간의 뜻을 찾고자 눈에 불을 켰다. 입만 열면 돈 돈 하는 오늘의 최고경영자(CEO)형 총장과 달리 언행이 곧은 인격자와 덕망가를 대학 리더의 첫째 조건으로 꼽던 시절이기에 그나마 가능했지 싶다. 4월혁명의 결정타 구실을 한 교수 데모 또한 같은 맥락이다. 80 고령의 스승들이 마지막 결판을 낼 기세로 들고 나온, ‘학생의 피에 보답하자’는 광목 플래카드의 4월이 아 신선했다. 15개항의 선언문 중에는 ‘곡학아세하는 사이비학자를 배격한다’, ‘정치도구화한 소위 문화인 예술인을 배격한다’는 통쾌상쾌한 주장도 있었다. 학자가 아니면 어떤가. 노령인구 증가를 두고 걱정들이 많지만 노인 스스로도 생각이 남달랐으면 한다. 50대 이상은 보수 일색이라는 고정관념 또한 바뀌어 무엇이 달라도 다른 세상 만들기에 힘썼으면 정말 좋겠다. 먹은 나이가 암만이건 삶의 종장을 ‘여생’으로 치부하는 판에 무엇은 못하리. 꾸어서 남 주지 않는 산뜻한 꿈의 실천인들 못하리. 최일남 소설가
하다가 모질고 악착스런 독재체제에 덜컥 멱살을 잡혔을지언정 신문은 자유와 희망의 단서를 발견하고자 기를 썼다. 그것도 경쟁이라고 졸업과 입학식의 총장 식사를 미리 알아내어 색다른 표현과 행간의 뜻을 찾고자 눈에 불을 켰다. 입만 열면 돈 돈 하는 오늘의 최고경영자(CEO)형 총장과 달리 언행이 곧은 인격자와 덕망가를 대학 리더의 첫째 조건으로 꼽던 시절이기에 그나마 가능했지 싶다. 4월혁명의 결정타 구실을 한 교수 데모 또한 같은 맥락이다. 80 고령의 스승들이 마지막 결판을 낼 기세로 들고 나온, ‘학생의 피에 보답하자’는 광목 플래카드의 4월이 아 신선했다. 15개항의 선언문 중에는 ‘곡학아세하는 사이비학자를 배격한다’, ‘정치도구화한 소위 문화인 예술인을 배격한다’는 통쾌상쾌한 주장도 있었다. 학자가 아니면 어떤가. 노령인구 증가를 두고 걱정들이 많지만 노인 스스로도 생각이 남달랐으면 한다. 50대 이상은 보수 일색이라는 고정관념 또한 바뀌어 무엇이 달라도 다른 세상 만들기에 힘썼으면 정말 좋겠다. 먹은 나이가 암만이건 삶의 종장을 ‘여생’으로 치부하는 판에 무엇은 못하리. 꾸어서 남 주지 않는 산뜻한 꿈의 실천인들 못하리. 최일남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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