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어진 새세상여성연합 대표
네가 논산훈련소로 입대한 지 열흘째 되던 날, 말로만 듣던 ‘장정 소포’가 도착했다. 겉포장에 괴발개발 쓰여 있는 몇 마디가 한눈에 네 손글씨였어. 포장을 뜯으니 꼬질꼬질한 양말과 내의, 푹 눌러쓰고 갔던 털모자에서 점퍼까지 모든 게 들어 있더라. 이럴 때 아들 생각에 한바탕 눈물 콧물을 흘려 마땅한 일이나, 웬일인지 그저 좀 아득한 느낌이랄까. 소포에 담아 보내려 평소 절대로 안 쓰던 편지를 낑낑대고 썼을 너를 생각하니 그만 웃음이 나왔어. 거기다 군대 간 아들이 납치되었다며 돈을 요구하는 난센스 보이스피싱을 경계하라는 훈련소장님의 편지까지 들어 있었으니 쓴웃음이 나오지 뭐니.
친절해진 육군훈련소 누리집 단체사진 속에는 애매한 웃음을 띠고 도토리 같은 얼굴을 한 네 모습이 떴더구나. 이제는 30연대 12중대 속 한 개의 숫자로 존재하게 된 아들. 살짝 심란해진 마음을 다잡으려 가스레인지 위 기름때 잔뜩 낀 레인지 후드를 박박 닦았다. 아들 덕에 봄맞이 부엌 대청소를 한 거지. 그다음엔 동네 미용실로 달려가 거금 4만5000원을 들여 꼬불꼬불 파마도 했고 말이야. 너의 입대는 집안의 큰 사건이라는 거 알지? 특히 건군 이래 최초로 현역 군인을 탄생시킨 송씨 집안의 흥분은 예상을 뛰어넘는 거였어. 할머니들께서는 날마다 전자우편을 네게 보내는 게 생모의 도리라고 누누이 강조하셨지 뭐니.
때마침 지하철 신문 속 “5월부터 훈련소서 엄마 면회”라는 헤드라인에 눈이 번쩍했다. 13년 만에 훈련소 면회 제도가 부활한다는 거야. 이건 또 웬 횡재? 면회 갈 때는 돗자리뿐 아니라 그늘막까지 챙겨 가야 한다던 수미 이모 말도 잊지 않고 있어. 네가 좋아하는 고기전을 꼭 만들어 갈게. 입대하기 전 2년 넘게 삼단 같은 머릿결을 날리며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던 네 모습이 아직 생생하다. 그 긴 머리칼을 가발회사에 보내 소아암 환자에게 줄 가발 선물을 만들면 좋겠다는 고모들의 제안을 너는 단방에 거절했지. 그런 아름다운 행동보다는 자신을 위해 가발을 만들어 쓰고 싶다던 너. 지금 엄마가 서울 동대문 어딘가 수제 가발 만드는 곳을 수소문하고 있는 중이야. 네 방 어딘가에 은닉해 놓은 그 긴 머리칼을 찾아낸다면 미리 만들어서 네게 줄 수도 있겠는걸.
이제 지하철 속 군복 입은 청년들의 얼굴이 낯설지 않다. 내 아들을 본 것처럼 그들을 바라보게 된다. 그들의 여드름 자국마저 귀엽게 느껴지니 말이야. 그들 또한 그들의 엄마들에겐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들 아니겠니? 그러니 군복 입은 청년들에게 맘속으로 축복을 보내게 되더구나. 조금 더 멀리 생각하면 북한의 군인들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하나도 없겠지. 총부리를 서로 겨누고 있다고 해도 남과 북의 모든 군인들은 그 엄마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귀한 아들들이니까 말이야.
이래저래 네가 입대한 뒤 평화에 대해 점점 더 민감해 지고 있다. 평화를 위협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행동이라 해도 절대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거든. 대북 전단지를 살포하려던 보수단체의 행동을 파주 임진각 지역 주민들이 앞장서서 막았다는 뉴스는 참 반가웠어. 힘을 가진 우리가 북을 자극하는 대신 신뢰할 만한 대화 상대로서 행동할 수 있게끔 돕고 또 도와야 하지 않겠니? 이제 나는 평화를 위한 일을 찾아서 해볼 참이다. 일개 군인 엄마지만, 평화를 해치는 어떤 사태, 어떤 정부 정책에도 저항할 거야. 전쟁 없는 세상을 꿈꾸며, 거칠지 않게 평화로운 방식으로 말이야. 한반도의 평화뿐 아니라 리비아 내전이나 민주화 바람이 휩쓸고 있는 북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의 평화에도 점점 더 관심이 커지고 있어. 결국 지구의 어딘가에서 누군가 다치거나 아파서 울고 있다면 나 또한 절대로 평화롭지도, 행복할 수도 없는 것 아니겠니? 건강하게 지내라. 내 아들과 세상의 모든 아들들을 축복한다.
박어진 새세상여성연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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