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섭 책·지성팀장
1928년 스웨덴 사민당 의장직을 맡은 페르 알빈 한손은 당 대회에서 ‘훌륭한 가정’의 모습을 소개했다. “가정이란 공동체, 그리고 함께함을 뜻합니다. 훌륭한 가정은 그 어떤 구성원도 특별대우하거나 천대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편애하거나 홀대하지도 않습니다. 훌륭한 가정에는 평등·사려·협력·도움이 존재합니다.” 한손의 연설은 계속됐다. 가정은 가족의 울타리만 뜻하는 것이 아니다. 국민과 시민을 품는 커다란 가정도 있다. 그런 가정에는 가난한 자와 부자를 갈라놓는 사회적·경제적 장벽이 없다. 이어 한손은 단호하게 말했다. “스웨덴은 아직 국민의 가정이 아닙니다.” ‘국민의 가정’(=국민의 집, folkhemmet)이라는 말이 스웨덴식 복지국가를 가리키는 은유로 선포되는 순간이었다.
‘국민의 집’은 애초 우파의 용어였다. 1909년 알프레드 페테르손이라는 스웨덴 농민운동 지도자가 처음 그 말을 정치적으로 사용했다. “우리 사회가 국민의 위대한 가정이 아니라면 무엇입니까?” 뒤이어 민족주의자 루돌프 셸렌이 ‘국민의 집’이란 말로 근대 사회가 잃어버린 민족적 연대와 공동체 정서를 환기시켰다. 이 우파의 용어를 탈취해 좌파의 언어로 바꾸어낸 사람이 사민당 지도자 한손이었다. 우파의 허를 찌르는 전략이었다. 당시 유럽에서 공동체주의적 호소, 민족주의적 열정은 보수 세력의 전유물이었다. 유독 스웨덴에서만 공동체주의와 민족주의가 좌파 사민주의의 언어로 통용됐는데,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한손의 리더십 덕이었다고 정치학자 셰리 버먼은 <정치가 우선한다>에서 말한다.
스웨덴 사민당이 보수의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당이 처음부터 실용주의적인 노선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스웨덴 사민주의의 역사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사이로 난 제3의 길이었다. 1889년 결성 때부터 스웨덴 사민당은 민주주의 쟁취를 사회주의 실현의 전제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들은 자유당 좌파와 연대해 보통선거권의 확대에 주력했다. 보통선거권이야말로 민중이 자신의 집에서 주인이 되는 데 필수 조건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지혜와 용기가 결합된 유연한 전술로 빠르게 세를 불린 사민당은 1917년 선거에서 31.1% 득표로 제1당이 되었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인 1917년 10월17일 스웨덴 사민당은 국왕과 보수파의 도전을 물리치고 중앙정부 구성에 처음으로 참여했다.
1920년대 ‘고난의 시기’에 유럽을 휩쓴 것은 ‘국민’과 ‘민족’을 앞세운 반민주적 극우 이념들이었다. 반면에 스웨덴에서 민족적 단합과 국민적 연대를 주도한 것은 사민당이었다. 사민당은 민주주의 원칙 위에 공동체 이념을 세웠다. 대공황의 한파가 몰아치던 1932년 선거에서 사민당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사민당은 자본주의의 희생자가 된 이들이 공장 노동자인지, 농민인지, 점원인지, 공무원인지, 지식인인지 묻지 않는다.” 사민당은 41.7%라는 최고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독일에서 나치당이 제1당이 되고 히틀러가 권력을 향해 뛰어들던 때에 스웨덴 사민당은 농민당과 연합정권을 구성해 새로운 정치 실험에 나섰다. ‘국민의 집’ 건설 프로젝트가 가동됐다. 1934년 사민당은 “반민주주의 전염병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조처는 복지정책”이라고 선언했다. 1936년 선거에서 사민당은 46%를 얻었다. 집권 사민당은 이후 30년 동안 ‘국민의 집’을 개조하고 확장하고 증축했다. 스웨덴 국민이 모두 그 커다란 집의 일원이 됐다. 대한민국은 ‘국민의 집’ 짓기에 관한 한 그 스웨덴보다 70년 뒤졌다. ‘포퓰리즘’을 들먹일 때가 아니다.
고명섭 책·지성팀장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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