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인
‘합리적 보수’를 자칭하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무상급식을 주민투표에 부치자고 나섰다. 합리적 보수는커녕 ‘비합리적 몽니’가 그 실체를 드러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부자들 자식에게 공짜 점심을 줄 수 없다는 그의 ‘비장한’ 각오와, 그럴 돈이 있으면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시민들에게 복지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일말의 진정성이 있으려면, 무상급식 논란이 있기 오래전부터 가난한 집안의 어린아이들이 눈물의 점심을 먹지 않을 수 있도록 조처했어야 마땅했다. 또 합리적 보수라면 복지 확충을 위해 부자와 기업에 세금을 좀 더 내야 한다고 주장했어야 마땅했다.
나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무상급식이 제기되면서 ‘조중동’과 한나라당을 비롯한 주류 지배세력들이 저소득층이나 소외계층 복지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높아진 흥미로운 현상을 볼 수 있다. 언제부터 그들이 복지에 관심이 많았는지 나로선 헤아릴 수 없는데, 어쨌거나 긍정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으니 우리로선 계속 오세훈 시장이 ‘공짜 시리즈’라고 부르는 무상급식, 무상의료, 무상보육을 더욱 강조할 필요가 있겠다. 물론 그 변화라는 게 우리가 공공성에 기초한 ‘분배’를 강조할 때 그들이 시혜적 ‘나눔’으로 방패막이를 삼는 것과 같은 데서 온 것임을 정확하게 인식하면서 말이다. 같은 말인 ‘분배’와 ‘나눔’조차 이렇게 달리 사용되는 한국 사회라면 구성원들이 포퓰리즘이란 말도 곱씹어 듣기를 기대하면서.
가난한 집안의 자식은 부모가 가난할 뿐이듯이 부자의 자식은 그의 부모가 부자일 뿐이다. 사유재산권이 신성시되는 한국에서도 상속세, 증여세가 존재하는 까닭이다. 그리고 가난한 집안의 자식이나 부자의 자식이나 같은 사회 구성원이다. 사회가 없으면 부자도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는 것은 서울특별시가 없으면 오세훈 시장이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부자가 사회에 빚진 자라면 가난한 사람은 사회가 빚진 자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 사회의 비극은 지배세력이나 엘리트층에게서 이런 사회 개념을 도무지 찾을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부, 명예, 권력이 사회에 빚진 것임에도 오로지 자기가 잘나고 자기 돈을 투자하여 부, 명예, 권력을 차지했다고 믿게 하는 사회화 과정 때문이다. 가령 유럽에서 불친절한 의사를 만나기 어려웠지만 한국에선 친절한 의사를 만나기 어려운데, 이 차이는 사회와의 관계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내가 의사가 되기까지 사회로부터 무상보육, 무상교육, 무상의료의 혜택을 받았다면 사회연대의식, 사회환원의식을 가질 수 있어서 환자들에게 친절하고 세금도 잘 내지만, 한국처럼 지독한 경쟁구조에서 자격증을 따기까지 거의 모든 비용을 가족(부모)이 충당한다면 주로 특권의식, 보상의식을 갖게 되어 환자들에게 불친절하고 세금 내기도 싫어하는 편에 속한다. 한국 사회에 가족이기주의가 만연한 배경 또한 다른 데 있지 않다. 합리적 보수는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말로만 하지 않는다.
보편복지가 북유럽에 비해 뒤떨어지는 프랑스 땅에서 무상교육, 무상의료에 가족수당, 주거수당까지 그 혜택을 받은 나는 이주노동자였다. 학년 초가 되면 학용품 사는 데 충당하라는 신학기수당도 받았다. 그 나라들이 보편복지제도 때문에 망했다는 얘기는 아직 듣지 못했는데, 오세훈 시장은 시정에 너무 바빠서 공부를 하지 않은 탓일까, 아니면 그 자신이 오이시디 나라에서 최저의 복지 비율, 최저의 국민부담률, 다시 말해 사회에 빚졌으면서도 가장 낮은 세금과 사회보장기여금을 내는 부자들과 재벌기업의 마름이기 때문일까.
아무튼, 그도 서울시장이 되게 해준 한국 사회에 연대의식, 환원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건 분명해 보인다. 그 또한 사회공공성의 다른 이름인 ‘공짜 시리즈’의 혜택을 받지 못했으므로.
홍세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인 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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