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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위장된 복지’, 현장으로 내려가 파헤쳐라

등록 2010-12-28 18:40수정 2010-12-29 11:09

[시민편집인의 눈]
불우이웃돕기는 ‘심리적 면죄부’…제도개혁 동참 유도를
노동·주거·보육·의료 현실보도로 복지논쟁 주도했으면
서울시 상암동과 붙어 있는 고양시 시골마을인 우리 동네에는 세밑이 되면 불우이웃을 돕는 방문자들이 끊이지 않는다. 우리 바로 옆집 아래채에 홀로 사는 할머니 셋방에는 그야말로 온정이 답지한다. 온갖 음식이 전달되고 연탄은 둘 데가 부족해 방안에까지 쌓아놓았다. 더욱 가관인 것은 부엌 출입문 바로 앞에 연탄트럭을 댈 수 있는데도 몇 십 미터 떨어진 곳에 대고 자원봉사자들이 한 줄로 서서 연탄을 나르는 광경이다. 각자 나르는 것이 몇 배 더 효율적인데도, 길게 늘어서서 연탄을 나른다. ‘증명사진’이 잘 나오기 때문일까? ‘○○사회봉사단’이니 ‘○○교회’니 하는 어깨띠까지 두르고 있다. 바로 옆방이나 이웃에 세들어 살면서도 독거노인 혜택을 못 받는 할머니들은 이런 광경이 못내 부럽다. 그들은, 멀리 떨어져 사는 자식들이 돌볼 능력이 없는데도,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등록을 못한다.

이런 풍경은 우리나라 사회복지의 현주소와 복지전달체계의 난맥상을 보여준다. 정부가 아니라 민간의 온정에 기대는 복지, 일상적 복지가 아니라 연말에 몰리는 일시적 봉사 수준의 복지, 보편적 복지가 아니라 일부에게 집중되는 시혜적 차원의 복지가 바로 그것이다. 시혜적 복지는 베푸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올해도 할 만큼 했다’는 심리적 면죄부로 남아 제도개혁을 가로막는 부작용도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구세군 자선냄비에 성금을 넣고,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성금유용사건과 관련해 모금이 부진할까 봐 걱정했다. <한겨레>도 모금에 참여하고, 사설(11월23일)에서 같은 걱정을 했다. 청와대 ‘나눔·봉사 가족 초청 오찬’에서 눈물까지 흘린 대통령의 언행은 선의로 봐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22일 보건복지부 업무보고 때 “내년 복지예산이 사상 최고이며 우리나라는 복지국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한 대목에 이르면, 그가 그리는 복지국가가 어떤 수준인지 확실히 드러난다. <한겨레>가 하루 늦긴 했지만, ‘GDP 대비 복지예산 내리막길’(24일)이라는 제목의 반박기사를 크게 보도한 것은 적절했다. 이어 27일치에는 정부의 해명을 맞받아친 기사와 사설을 내보내 <한겨레>가 논쟁의 중심에 섰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복지지출 증가율이나 선진국의 복지지출 비율 등 수치만을 따져 공방전을 벌인 것은 아쉬웠다. 복지와 직접 연결되는 주택 문제가 선진국 가운데 가장 심각한 점, 패자부활의 기회가 거의 없는 취업전선, 국민 40%가 적자인생으로 내몰리는 가계수지, 너무나 미흡한 사회복지 전달체계 등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면 터무니없이 낮은 복지수준을 실감나게 드러낼 수 있으리라.

‘주택 문제’만 하더라도 공공임대주택 비율은 네덜란드 36%, 스웨덴·영국 22%인 데 견주어 한국은 3%이다. 복지후진국인 미국도 공공주택 비율은 낮지만, 자기집 보유율이 67.5%에 이른다. 우리는 공공임대주택도 별로 없는데 서울에서 자기집을 가진 가구는 계속 줄어 절반이 좀 넘는다. 어디다 몸을 누이란 말인가? 지하방에라도 거처를 마련하려면 웬만한 소득은 집주인에게 다 털린다.

이 대통령의 어법을 관찰해보면 툭하면 “세계적 추세”를 들먹이며 자기논리를 강화한다. 미디어법 개정 때도 한국적 언론현실을 외면하고 사실을 왜곡한 채 ‘세계적 추세’론을 내세웠다. 이번에도 스웨덴 국왕한테 들었다는 말, 곧 “스웨덴도 복지체제가 시대에 맞지 않아 조금 후퇴시키려 한다”는 말을 전하면서 우리 복지현실을 왜곡했다. 최고 우등생이 ‘이제 조금 놀면서 공부하겠다’는데 꼴찌가 ‘나도 놀겠다’고 나서는 꼴이다.

‘먹는 문제’는 복지의 기본 중 기본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말이 올해 화두가 됐는데, 한국적 정의는 ‘독식’이 아니라 ‘나눠먹는 문제’가 아닐까? 바이킹은 해적질을 하다가 고향에 돌아오면 약탈한 음식들을 죽 늘어놓고 누구나 평등하게 골라먹었는데, 그것이 ‘뷔페’의 원조였다. 나눠먹는 그들의 습속이 복지국가의 전통으로 이어진 걸까?


우리처럼 국과 탕이 많은 나라도 없지만, 한솥 탕국을 끓여 주인과 하인 간에 음식을 공유하는 ‘탕반문화’에도 소득분배의 정신이 살아있었다. 사람의 뇌는 먹는 것에 대한 차별을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쪽으로 진화해왔다고 한다. 임오군란도 급료로 주는 벼에 모래를 섞어 먹을거리에 장난을 친 게 군심 폭발의 계기였다.

무상급식 문제는 최대 선거이슈가 될 가능성이 높다. 지난주 시민편집인실에 전화한 한 남성 독자는 “기자들이 학교현장에 나와보면 왜 무상급식이 필요한지 알 수 있을 텐데 곽노현과 오세훈의 말싸움만 중계하고 있다”고 말했다. 언론의 의제설정은 언론답게 해야 한다. 통계로만 얘기하는 것은 연구기관이 할 일이다.

<한겨레>가 복지논쟁을 주도하려면 현장으로 가야 한다. 빈곤층의 노동과 주거 현실, 보육과 교육, 의료 실태는 모두가 현장이다. 4대강 사업과 과다한 도로건설 등 토건사업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군비경쟁을 줄이지 않으면서, 부자증세를 하지 않으면서 복지를 얘기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시장의 도덕적 한계가 들통났는데도 복지를 시장과 개인에게 맡기는 것은 ‘위장된 복지’다. 대형 교회나 사찰이 세금 한푼 안 내면서 열심히 불우이웃돕기에 나서는 것을 정의라 할 수 있을까?

플라톤은 “불의의 가장 나쁜 형태는 위장된 정의”라고 했다. 복지의 가장 나쁜 형태도 ‘위장된 복지’일 것이다. 이봉수 시민편집인,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한겨레>는 독자와 대화할 준비가 돼 있나

신문이란 상품이 일반 상품과 다른 점은 두 부류 고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독자와 광고주 집단이 그들이다. 언론이라는 공론장을 자본이 장악하면서 언론은 독자보다 광고주에게 점점 더 충성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런 저널리즘의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구독료 수입을 올려야 하는데 매체가 난립하는 디지털미디어 환경에서는 그마저 어렵다. 결국 독자의 충성도를 높이는 주요 수단은 콘텐츠의 질을 높이고 독자와 진지하게 대화하는 것이다.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소셜미디어는 그런 점에서 변화된 미디어환경이 신문에 제공하는 위기인 동시에 기회라 할 수 있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구축되는 네트워크는 물적·인적자원이 취약한 매체가 거대 매체를 이기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소셜미디어의 명제는 ‘우리는 나보다 똑똑하다’는 건데, 그것을 확장하면 ‘독자집단은 개별 기자보다 똑똑하다’는 것이다. <한겨레>는 두어달 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시스템을 확충했지만, 편집국원들의 적극성 부족으로 아직 제대로 가동되지 않는 듯하다. 또 시민편집인실에는 “편집국 등에 전화를 해도 무성의하게 받는다”거나 “<한겨레>에는 기사에 댓글을 달아도 필자의 반응이 없다”는 불만이 접수된다. 한 독자는 “구청보다도 못하다”고 불평했다.

소셜미디어는 기본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신속한 ‘반응’을 전제로 하는 소통방식이다. 홍보나 이벤트용으로 또는 취재용으로만 활용하려 한다면 충성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자기 기사에 달린 댓글들, 특히 칭찬이 아니라 비판에 신속하게 반응하지 않는 행위는 직무유기나 다름없다. 시민편집인실도 독자의견 접수 창구를 일원화하고 댓글도 비판적 내용 위주로 신문지면에 소개하는 한편으로 독자와 직접 대화하기 위해 독자위원회를 꾸리는 등 증면과 조직개편 방안을 회사 쪽과 합의했다. 그러나 아직 회사 쪽 조처를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다. 독자들 소리를 진지하게 들으려는 노력을 다시 한번 촉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봉수 시민편집인

남북대결 희생자는 ‘국민’, 원인 드러내고 해법 찾아야

“남북대결의 희생자는 국민입니다.” 김경록 독자는 일촉즉발의 남북대결 분위기 때문에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답답하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안보가 강조되면서 ‘군사력’을 중시하는 냉전적 사고가 만연하고 있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크고 작은 충돌 때문에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한겨레>가 이 시점에서 북방한계선(NLL) 문제 등의 근본해결책을 찾는 노력을 좀 더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교육 관련 발표자료, 관점 갖고 보도해주길

김영희 독자는 지난 8일 ‘서울 강남 완패시킨 세계에서 가장 공부 잘하는 도시’란 제목의 인터넷판 머리기사에 여러 가지로 공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우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09 학업성취도 국제비교연구’ 결과에 대해 국가와 도시를 섞어 순위를 매기고 발표하는 건 적절치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경우 전국을 대상으로 한 조사인데 상하이와 비교하며 ‘강남을 이겼다’는 식으로 제목을 단 것도 맞지 않을뿐더러 일등지상주의를 부추기는 것 같아 불편하다”고 말했다.

이동구 시민편집인실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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