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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새벽에 웃다 / 최일남

등록 2010-12-24 20:47

최일남  소설가
최일남 소설가
텔레비전을 통해 심심산골 노부부의 고적한 생활을 대할 때마다 마음이 좀 짠하다. 요새는 세밑의 공연히 어설픈 심정 탓에도 한층 쓸쓸해 뵈거늘,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한 양주는 고개를 흔든다. 쉴새없이 일손을 놀리며 이대로가 좋다고 웃었다.

나는 그리고 벌판에 진을 치고 앉아 줄곧 박장대소를 거듭하는 이 마을 저 마을의 안팎 노인들을 일요일 꼭두새벽마다 만난다. 이미 380회를 넘긴 <문화방송>의 ‘늘푸른 인생’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애국가까지 듣고 잠자리에 들기는 어려워도 애국가와 더불어 하루를 시작하기는 쉬운 나이 덕이다.

육십 줄은 ‘어리다’고 따돌렸나. 칠십 넘은 노인네들, 특히 할머니들이 들고 나온 웃음의 소재는 거의가 징글징글한 가난이었다. 서 발 막대기 내둘러야 검불 하나 걸릴 것이 없던 극빈을 그러나 지난날의 우스개로 돌린다. 동네 송아지는 커도 송아지라는 말이 있듯이, 마을사람끼리는 서로 간에 익히 아는 사연일지 모르되 듣는 쪽은 일일이 기막혔다. 자신의 칠흑 같은 세월을 옛이야기처럼 까발리는 솜씨가 깜냥깜냥 능란해서도 덩달아 킥킥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그렇기로 이제는 돌아와 왕년을 되새기는 과정에 ‘눈물 찔끔’ 장면이 없을까. 백발의 한 어머니는 도시락 찬으로 내내 생된장만 싸 준 자식의 이름을 부르며 미안하다고 울먹였다. 시난고난하다가 폐병 3기에 이른 아내를 병원에 뉘어놓고 왔다는 남편이 자기도 위암으로 사경을 헤맨다고 실토하자 여기저기서 손수건들을 꺼냈다. 맨몸으로 만나 오만 곤경을 견디며 결혼생활 73년을 헤아리는 부부에게는 짝짝짝 박수를 보냈다. 지역 지역의 오리지널 사투리가 또 매번 정겹다.

어느덧 고희를 바라보는 뽀빠이 이상용이 진행을 맡아 상투적이기 쉬운 판을 재미지게 이끌었는데, 나라는 구경꾼은 이런 정황이 언제까지나 갈까. 두루뭉술한 호박을 날씬한 미인의 몸매로 바꿀 만큼 지독하게 고생한 사람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무엇이 남을까.

마을의 그분들은 아직 현역인 수가 많았다. 여간해서 몸을 아끼지 않고 들판을 지킨다. 일찍이 우리 사회의 기본 단위였던 마을이 그 덕에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지만 앞으로는 어찌될까. 지지난주의 통계청 발표를 보니 우리나라 농가 수는 30년 사이에 절반 이상 줄고, 농가 인구는 80%나 감소했다고 한다.

흐르는 민심을 보로 막듯이 4대강 사업에 억척을 떠는 정부는 도처에서 흙 대신 시멘트를 들이붓기 바쁘다. 이러다 농촌이 회촌(灰村)으로 변할까 두렵다. 실천 단계에 들어선 ‘친수법’ 때문에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노래도 더 이상 못 부르게 생겼다. 김소월의 시에 김광수가 곡을 붙인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를.

책상물림의 속 편한 시선으로 옛풍경만을 탐하려는 게 아니다. 그처럼 껄렁한 인식이 통할 세상이 진작에 아니려니와 사람의 훈김이 사라진 텅 빈 마을은 상상하기조차 끔찍하다. 도읍과 향촌의 구별이 별로 없던 시절의 우리 두레는 다른 나라에 드문 미덕이요 삶의 지혜였다.


송기숙 작가는 ‘나’를 ‘우리’로 지칭하는 언어습관도 공동사회에서 형성된 의식의 흔적이라고, 그이의 산문집 <마을 그 아름다운 공화국>에서 말했다. 술이나 밥을 함께 먹었을 때 서로 자기가 계산하겠다고 다투는 일반적인 모습도 같은 맥락이라는 지적이 산뜻하다. 그게 모두 마을 공동체의 근간이었던 두레정신에서 나왔다고 보았다.

지금은 어림없다.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데는 많은 푼수로 엔간히 산천을 쏘다닌 자의 어쭙잖은 발품을 떠나 다들 아는 상식이다. 따라서 궁핍과 전란에 유난히 시달린 세대들이 고향에 남아 나누는 웃음엔 깊은 우수가 한 자락씩 깔려 있는지 모른다. 그런 마을은 한국적 정서의 원천인 까닭에 텔레비전 화면의 주민들이 입을 모아 띄운 “인심 푸근한 우리 마을로 놀러 오라”는 초대장이 고마웠다. 수더분한 말추렴이.

최일남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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