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내가 사병으로 복무할 때 우리 부대의 선임하사는 ‘군대생활이 헐렁해져서 요사이 사병들은 군인정신이 쏙 빠졌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었다. 사병들에게는 한겨울에도 내의를 입히지 않은 채 훈련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었고, 식사시간을 5분 이상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 기억에 그가 군인정신이 충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사병들에게 부식으로 나오는 곰보빵을 보따리에 싸서 집에 가져가는 사람이었고, 부대의 연료를 팔아서 나온 돈을 부대장이 나누어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이었다.
‘연료를 팔아서 나온 돈’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통신부대인 우리 부대는 여러 통신소를 거느렸고, 통신소마다 몇 기의 발전기가 있었다. 외부에서 공급하는 전력에 문제가 발생할 때, 그에 대비하기 위해 마련된 발전기였다. 그때만 해도 전력이 안정되어 있을 때라, 정전사태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 발전기를 매일 30분씩 시험가동해야 하는 것이 규정이었다. 부대는 발전기를 가동하지 않았다. 발전기 관리일지는 허위로 작성되었고, 연료도 장부상에서만 소비되었으며, 그렇게 해서 남은 기름은 비밀리에 처분되었다. 이는 여러 개의 죄목이 복합되어 있는 명백한 범죄행위였지만, 내가 그에 대해 큰소리칠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그 연료소모대장을 정리한 사람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내부자 고발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나는 전역한 뒤에도 몸이 불편할 때는 꿈에 연료소모대장을 편 채 앉아 있곤 했으니, 그런 나에게 군인정신 같은 것을 운위할 일은 아니다.
그것은 40년 전의 일이고, 그 후 군대의 복무환경이 크게 바뀌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군대생활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젊은이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떠들어대는 군대 이야기, 특히 축구 시합 이야기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 그 이상한 자랑 속에는 자조적인 한탄이 교묘하게 숨어 있다. 누구에게 들어도 똑같은 그 군대 이야기는 저 깊은 외상에 대한 자기치료 방식의 하나일 뿐이다. 이 외상과 이 외상을 입힌 사람들의 은밀한 죄의식은 생각이 될 수 없는 생각을 생각처럼 만들어버린다는 데에 또 하나의 사회적인 문제가 있다.
나는 안상수 의원이 연평도에서 보온병과 포탄을 혼동한 것이 그렇게 크게 조롱을 받아야 할 실수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많은 포탄의 종류와 모양새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문제는 안 의원이 어떤 연유에서인지 군대를 가지 않았다는 것이고, 어쩌면 군대를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 높은 자리에 남보다 먼저 올라갈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군대에 가지 않았지만 이 점에서는 그도 역시 군대 외상의 기이한 희생자이다.
단축된 복무연한을 되돌린다는 생각은 북한과의 관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결과를 가장 만만한 사병들의 책임으로 돌린다는 점에서 역시 생각이 될 수 없는 생각이다. 가산점 제도를 되살린다는 생각은 더욱 심각하다. 군인으로 복무하는 젊은이는 수십만인데, 그 혜택을 받는 것은 한 해에 300~400명을 넘지 못할 터이니 그 혜택을 사병들이 체감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반면에 여성들이 공직에 들어갈 길을 막아버린다는 나쁜 효과는 확실하다. 어느 인사가 ‘여성들도 군인의 어머니이고 장모이니 가산점 제도를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는데, 그는 여성들이 딸들의 어머니이고 며느리들의 시어머니라는 생각은 왜 하지 않았을까.
민족의 화해가 크게 진전을 이루기 전까지는 이 나라의 젊고 건전한 남자들이 상당기간 군인으로 복무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도 한데, 한국의 모든 남자들이 군대 외상으로 시달리지 않으려면 군 복무가 행복해야 할 것이다. 그 행복은 가산점 같은 면피 수준의 제도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조국에 긍지를 느끼고 복무기간을 자기발전의 기회로도 삼을 수 있는 환경에서 비롯된다.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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