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란 소설가
케이티엑스(KTX)에 타고 눈 좀 붙이겠다고 생각했다간 자칫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 깜빡 잠이 들었다가 내릴 역을 지나치고 허둥대는 이들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비몽사몽 충혈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면서도 이게 꿈은 아니겠지, 란 표정이었다. 새로 탄 손님이 제자리를 찾느라 깨운 뒤에야 아차차, 하는 이들도 종종 보았다. 한번은 서울 유학하는 딸아이를 배웅하러 기차에 올라탄 어머니가 문이 닫히는 바람에 꼼짝없이 한 정거장을 가기도 했다.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질러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컴퓨터로 작동되기 때문에 한번 닫힌 문은 열기 어렵다고 누군가 알은체를 했다. 케이티엑스에서 한 정거장 구간은 꽤 먼 거리이다. 손지갑만 달랑 들고 슬리퍼를 끌고 온 어머니는 내내 얼떨떨해 보였다. 케이티엑스에서도 이런 추억거리 하나쯤은 만들 수 있다.
케이티엑스를 타면 객차 안에서 잡담은 삼가고 휴대전화 벨소리도 진동으로 해주십사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대부분 출장중인 회사원이 많다. 말끔하게 복장을 갖춰 입었다. 창가 쪽에 앉아 통로로 나가느라 양해를 구할 때 빼고는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 서울~부산 거리라고 해야 이제 두 시간 안팎으로 줄어들었으니 가능한 일일 것이다. 사람들은 노트북을 켜놓고 밀린 일을 하거나 휴대전화로 텔레비전을 시청한다. 이것이 케이티엑스 분위기이다.
여덟 살, 외가로 가는 장항선 완행열차를 탔던 때가 떠오른다. 한 시간이면 도착할 거리를 그땐 네 시간도 더 걸려 갔다. 자도 자도 목적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잠에서 깰 때마다 곁에 앉아 있던 사람들도, 기차 안의 풍경도 바뀌어 있었다. 객차 양쪽에 길게 한 줄 의자가 놓인 기차였다. 앉을 자리 없어도 할머니들은 엉덩이부터 디밀었다. 그때마다 요상하게 자리가 났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이들이 우르르 올라타면 온양온천역이었다. 바다가 가까워 오면 촌부들이 조개나 생선이 가득 든 고무 다라이를 들고 탔다. 다라이 옆에 신문지를 깔고 앉은 이들은 처음 보는 이들에게도 말을 붙였다. 어디서 와유? 어디까지 가유? 처음 시작은 늘 이랬다. 그 시절 기차는 칙칙폭폭 달렸다. 긴 시간 함께 있어야 했으니 무료함을 달래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동죽 맛을 쇠고기가 당하기나 하느냐고 알려준 것도 기차 안에서 만난 할머니였다.
기차를 타고 외가에도 가고 지방 근무 중인 아버지에게도 갔다. 기차 안에서 많은 이들을 만났다. 술이 잔뜩 취해 안주머니에서 돈다발을 꺼내 흔들던 아저씨도 있었다. 내게 삶은 달걀을 사주었다. 무엇을 판 돈이었을까, 누군가 돈을 훔쳐갈까봐 아저씨가 졸 때마다 눈에 불을 켜고 도둑을 지켰다.
목적지에 도착할 즈음이면 케이티엑스에서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정시에 고객님들을 모실 수 있어 저희도 기쁘게 생각합니다.” 기차 이용료가 비싼 만큼 시간이 급한 이들이 이용할 테고 당연히 십여분 연착에도 불평들이 쏟아지는 모양이다. 시원스레 앞으로 달려도 마땅찮을 판에 뒤로 두 정거장이나 후진했던 옛 기억이 떠오른다.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우리에게 시간관념을 심어준 것도 바로 철도이다. 철도 역사 중앙엔 커다란 시계가 걸려 있거나 주위엔 늘 시계탑이 있었다. 하루 세 끼 밥 먹는 때로 시간을 나누던 우리가 기차 시간표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다. 옛날 외가의 안방 문가에도 자디잔 글자로 철도 출발과 도착 시간이 적힌 시간표가 붙어 있었다.
그 시절이 그리우면서도 시간에 쫓겨 어쩔 수 없이 고속열차를 탄다. 추억도 사람도 경치도 포기하고 얻는 것은 시간이다.
잠깐 존 모양이다. 잠결에 천안아산역을 그대로 통과한다는 안내방송을 들은 것도 같았다. 누군가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측은하다는 듯 한 남자가 내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눌린 머리를 다듬을 겨를도 없이 헐레벌떡 소지품을 챙겨 일어섰다. 천안아산역과 광명역까지도 그대로 통과해 평소 운행 시간보다 20여분 단축된 기차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하성란 소설가
잠깐 존 모양이다. 잠결에 천안아산역을 그대로 통과한다는 안내방송을 들은 것도 같았다. 누군가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측은하다는 듯 한 남자가 내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눌린 머리를 다듬을 겨를도 없이 헐레벌떡 소지품을 챙겨 일어섰다. 천안아산역과 광명역까지도 그대로 통과해 평소 운행 시간보다 20여분 단축된 기차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하성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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