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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태백석탄박물관 / 황현산

등록 2010-10-15 18:19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월간 <현대시>가 주관하고 태백시가 후원하는 문학제가 지난 주말 태백에서 열렸다. 나는 그 행사의 일환인 문학토론회에 발표자로 참석했다. 내가 태백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 추억은 다른 지면에서도 상세히 이야기한 바 있지만, 나는 대학교 3학년 때, 지금은 태백시가 된 황지의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다. 벌써 반세기가 다 되어 가는 옛날의 일이고 내가 황지에 머문 시간은 하루가 채 안 되지만 그때 내가 본 풍경과 느꼈던 감정은 지금도 기억 속에 생생하다.

아마도 10월 하순경이었을 터인데, 두꺼운 옷도 준비하지 못한 나에게 황지는 서울의 한겨울 못지않게 추웠다. 작고 낮은 집들, 포장이 안 된 도로, 거리는 온통 시커멓게 탄가루를 둘러쓰고 있었고, 마을을 둘러싼 솔밭에서는 길고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들렸다. 검은 길바닥에는 여기저기 개숫물이 얼어붙어 있고, 거기 함께 얼어 있는 밥풀을 떼어 먹으려는 듯 역시 탄가루를 둘러쓴 여윈 개들이 안타까운 혀로 검은 얼음을 핥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적막하고 적막한 만큼 아름다웠다. 어둡도록 검은 풍경과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새파랗고 햇빛은 다른 세상의 햇빛처럼 찬란했다. 나는 춥고 배가 고팠지만 마음은 어느 때보다도 더 고양되어 있었다. 아마도 인간에게 전혀 호의를 내보이지 않는 자연, 날카롭게 날이 선 돌과 바람과 흙에 자기 육체를 직접 부딪치고 사는 그런 삶의 개념을 그 풍경 속에서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찾아간 태백시에 옛 황지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았다. 작은 마을은 시가지의 윤곽을 완연히 갖추었고, 화려하지는 않으나 제법 높은 현대식 건물들이 촘촘히 들어서 있었다. 낙동강의 발원지로 알려진 시내 한복판의 작은 못 황지를 기준으로, 내가 하룻밤을 기숙했던 여인숙의 방향을 겨우 가늠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풍경의 편린이라도 내게 다시 보여준 것은 행사 뒤에 방문한 ‘태백석탄박물관’이었다. 석탄산업이 퇴조하고 탄광촌이 고원휴양도시로 바뀌면서 ‘이 나라 산업발전의 원동력’이 되어온 그 긍지와 고통이 ‘관광문화자원’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석탄박물관으로는 동양 최대를 운위해도 좋을 만큼 거대한 이 박물관은 온갖 종류의 광물과 동식물의 화석부터 소개했다. 석탄의 과학, 석탄의 경제, 석탄의 문화, 석탄의 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 석탄과 관련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그렇게 많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이 백과사전적 전시는 갑자기 한 편의 드라마로 바뀌었다. 이 화석연료를 캐던 광산의 역사가 전개된 것이다. 조선시대에 베잠방이를 걸치고 괭이와 지게로 석탄을 캐어 나르던 선조 광부들의 그림, 징용을 당해 일본의 광산에서 인간의 삶이 아닌 삶을 살아야 했던 젊은 광부들의 사진과 아직도 이역의 절간에 쌓여 있는 그들의 유골 사진이 벽에 붙어 있고, “탄굴 파서 벌아봐야 햇빛 보면 맥 못 추고 첫날부터 외상술에 퇴직금은 빚잔치”라는 ‘탄광 아리랑’의 노랫말처럼, 지난 시절 희망도 없이 막장에서 육체를 소모하던 광부들의 노동현장과 생활상이 인형으로 재현되어 있었다. 내가 옛날에 본 방 하나 부엌 하나 지붕 낮은 판잣집도 거기 있었고, 그 작은 마당에서 땅에 금을 긋고 놀던 아이들도 거기 있었다. 그 거대한 박물관은 우리 역사의 화석이었다. 그 무심한 돌들은 거기에 지긋하게 눈길을 주는 사람을 만나면 그 마음을 타고 물이 되어 흘러나온다. 울고 나오는 영화관은 많지만 울고 나오는 박물관을 다른 데서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화석의 슬픔에 감히 문화자원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은 그나마 이 사회가 발전한 덕분일 것이다. 저 광부들의 고통과 거기 감춰져 있는 작은 희망과 함께 민주의식이 크게 성장하였고, 인의의 귀중함도 알게 되었다. 과거를 영예롭게도 비열하게도 만드는 것은 언제나 현재다.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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