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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민편집인의눈] 진보진영은 홈경기에서도 패하고 말 건가?

등록 2010-09-28 18:54수정 2010-09-28 23:28

홈-어웨이 방식으로 치러지는 챔피언스리그 축구에서 전력이 비슷한 팀끼리 격돌할 때 흔히 쓰는 전략이 ‘홈 승리, 어웨이 무승부’다. 이명박 정권이 ‘공정한 사회’ 담론을 치고 나온 것은 어웨이 경기에서 지지 않으려는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보수와 진보의 가치를 자유와 평등, 성장과 분배로 대별한다면, ‘공정한’이라는 수식어는 원래 진보적 가치와 잘 어울리는 것이다.

논란만 벌이고 있는 진보의 토론장에 잠깐 들른 보수가 진보담론을 채 갔다 할까? 사실 진보는 집권했을 때도 실천에 옮긴 진보담론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성격에 대해 보혁 논란이 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뭘 뺏은 것도 없는데 ‘잃어버린 10년’ 소리를 듣는 건 참 억울한 일이다. 그러나 어차피 ‘정치는 레토릭’이란 현실을 인정한다면, 자기들 잘못도 있다.

이에 견주어 이명박 정권은 최근 ‘친서민’과 ‘대·중소기업 상생’까지 담론시장에서 구매해 자기네 소유로 만들어버렸다. 대통령은 갑자기 서민의 권익을 옹호하는 로마시대 호민관이라도 된 듯이 말하고 행동한다. ‘기업 프렌들리’라는 보수담론에서 출발해 ‘중도실용’을 거쳐 진보담론까지 두루 석권해버린 것이다.

‘공정한 사회’는 사회 전 부문에 걸쳐 혁명적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로 증폭될 수 있는 담론이다. 그런데도 보수정권이 그 화두를 스스로 던진 이유는 뭘까? 보수세력도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가 양극화하고 불공정한 사회가 됐지만, 그것만으로 자발성을 설명하기는 힘들다. 자신있게 치고 나온 것은 무엇 하나 힘을 모으지 못하는 야권의 분열과 진보담론 부재 상황에서 ‘공정성’ 이슈를 선점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 아닐까? 빠져나갈 퇴로도 있다. ‘무엇이 공정한 사회냐’를 놓고 해석을 달리하면 될 테니까. 어쨌든 27일 청와대가 발표한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지지도는 50%를 넘어섰다.

여권의 선제공격에 태연자약한 모습을 보이는 곳이 야권과 진보진영이다. 특히 민주당은 여권의 움직임을 ‘자충수’ 정도로 폄하하면서, 비좁은 ‘인재 풀’ 안에서 대표선수를 뽑는 일에 여념이 없다. ‘공정성’ 담론의 흡인력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수준이니, 그것을 ‘여권의 자충수’로 만들 재간이 있겠나? 국민들 기억에 민주당이 내놓은 것이라곤 무상급식 외에 생각나는 게 없다. 그것도 김상곤 경기도교육감한테 빌린 것이지 민주당 지도부가 주체적으로 만든 게 아니다.

그동안 기득권세력과 정치권이 둔감했을 뿐 ‘공정한 사회’를 향한 대중의 공감대는 확산일로를 걸어왔다. 촛불시위도 ‘강부자’ ‘고소영’ 내각으로 대표되는 불공정 인사와 재벌·부자 편향 정책, 양극화 등 ‘불공정한 사회’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쇠고기 문제가 크게 불거진 것도 ‘불공정 협상’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중앙일보>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 73%가 한국을 ‘불공정한 사회’로 보고 있다. 보수가 어젠다 하나는 잘 잡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진보언론은 이 국면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적어도 ‘공정한 사회’ 담론을 누가 얘기했건 배척하면 안 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한겨레>도 창간 이래 ‘공정한 사회’를 주창해온 만큼 일관성 문제가 있다. <가디언> <뉴욕 타임스> 등 권위지들은 정파가 아니라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보수정당도 옹호하고 진보정당도 비판한다.

그러나 <한겨레>는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공정한 사회’를 천명했을 때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눈에 띄는 칼럼도 40여일간 불과 4편 정도였다. 말의 진정성을 문제 삼아 무시하는 건 일리가 있지만, 일단 ‘공정한 사회’로 가는 디딤돌로 적극 활용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한겨레>가 바라는 ‘공정한 사회’의 진정한 모습을 그려주는 건 어떨까? 그것은 현재 한국 사회와 정반대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런 불공정 사회를 만든 주역이 현 정부라는 사실도 자연스레 노출될 것이다. 부문별로 살펴보면 정치인의 언행 불일치, 제도와 행정의 불일치가 수도 없이 드러날 것이다.


‘대·중소기업 상생’ 문제는 경제팀에서 그런대로 잘 다뤘으나, 결국 언행과 제도와 행정의 불일치가 단적으로 드러나는 사안이다. 상생이 안 되는 것은 전문화하지 못한 몇몇 대재벌의 선단식 경영과 계열사간 내부거래, 하도급·부품업체에 대한 우월적 지위 남용 등 불공정거래가 만연하기 때문인데 제도적 규제는 더 완화됐다. 공정거래위원회와 검찰은 단속을 않거나 하더라도 후하게 정상참작을 한다. 그럼에도 재계 총수들을 만난 자리에서 대통령은 “법과 제도를 통한 압박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으니 직무유기를 누가 조장하는지 명백해진다. 큰 신문사일수록 무가지와 경품을 많이 뿌려 신문시장 질서가 교란되는데도 이 정부 들어 제대로 단속한 실적이 없다.

교육은 초·중·고에서 사교육과 국제중·자사고·특목고 등으로 공정성이 무너진 지 오래이고, 대학도 ‘시장’에 맡겨져 서울의 일부 대학만 재벌의 지원을 받는 등 교육격차가 ‘불공정 사회’로 가는 출발선이 되고 있다.

가장 불공정한 곳은 노동시장이다. 자살률이 최고로 높은 나라에서 ‘노동시장 유연화’는 여전히 진행형이고, 노사분규 현장에서는 상생이 아니라 ‘기업 프렌들리’가 ‘공권력’ 행사의 잣대가 된다. 분규현장 강경진압을 신조로 삼는 사람을 경찰청장에 임명하고, 한나라당 대표가 “공정사회의 기준을 법치주의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 것을 보면, 여권이 그리는 ‘공정한 사회’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가늠할 수 있다.

부동산시장은 일하는 사람보다 안 하는 사람에게 더 높은 소득을 안겨주면서 전국민에게 ‘불공정 사회’의 쓴맛 단맛을 다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이 정부는 종부세를 무력화했다. 거품이 빠질 조짐이 보이자 내놓은 부동산시장 부양책은 혹평하면 ‘불로소득 보전책’이고 ‘건설업체 연명책’이다.

저임금과 불로소득이 극명하게 대비되고, 낙하산 은행장 연봉이 10억대에 이르는 현실을 두고 누가 ‘공정한 사회’를 말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란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4대강에 쏟아붓는 예산을 감당하기 위해 복지지출은 줄이고 서민이 상대적으로 많이 무는 간접세와 공공요금은 올리려 하고 있다. “공정한 사회를 통해 기회균등의 헌법정신을 구현할 적임자”로 포장된 총리 후보는 알고 보니 ‘공정한 사회’의 기본인 병역의무를 다하지 않은 사람이다.

야당 지지율이 이런 여당에도 못 미치는 건 무슨 조화인가? 이슈를 선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민주당에는 전당대회를 며칠 앞두고도 ‘담대한 진보’ ‘실천 있는 진보’ ‘역동적 복지’ ‘큰 변화’ 등등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색깔 없고 추상적인 구호가 난무한다. 부유세 주장이 있지만, 당내에서도 정체성 덫에 걸린 상태이다. 혹시 홈구장 색깔이 원래 진보가 아니었나?

‘빅3’는 뜨려고 하지만 국민들은 과거 있는 남자들의 ‘패자부활전’에는 관심이 적다. 감동을 주는 것은 지나온 삶의 이력이다. 지역주의와 결합한 보수성에 상당수 진보층이 등을 돌리고 있고, 대의원 절반 이상이 50~70대라는 점에서 거기서 뽑힌 대표가 젊은 층 지지를 끌어들이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한겨레>는 후보 8명을 모두 인터뷰해 꽤 넓은 지면을 할애했는데, 한나라당 대표경선 때와 견주어 균형을 잃었다는 지적을 할 수 있겠다. 이번 경선 과정에서 야권 연대 또는 진보연합의 기초를 마련하지 못하는 데 대해서는 좀더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적이라고 생각하면 공격하라. 아군이라고 생각하면 더욱 맹렬히 공격하라.’ 이 말은 강한 조직을 만들기 위해서는 호된 비판과 고육지책이 필요하다는 뜻일 게다. 적어도 진보담론에서는 우위를 점하기 위해 진보언론이 할 일은 그런 게 아닐까? 축구도 홈구장에서 밀리면 설 땅이 없다. 골득실차가 같은 경우엔 ‘원정 다득점 원칙’이 적용된다.

이봉수 시민편집인,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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