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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기억과 장소 / 황현산

등록 2010-09-17 19:55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학교에서 삼청동 쪽으로 가기 위해 차를 끌고 삼선교를 지나 성북동 길을 오르다 보면 나도 모르게 고개가 왼쪽으로 돌아가곤 한다. 대개의 경우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가끔은 다른 사람을 찍은 사진에서 내 뒷모습을 볼 때처럼 혼자 머쓱해지기도 한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말년을 보냈다는 북향집 심우장이 그 어름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선사의 시에 대해 자랑하기 어려운 글을 써서 두어 번 발표하기도 했지만, 심우장을 찾아가 본 적은 없다. 발등에 떨어진 일도 미처 챙기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이 특별한 계기도 없이 심우장을 찾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내 고개 돌림 속에는 별로 깊지 않은 죄책감도 스며들어 있다.

그렇다고 돌아간 내 고개를 내가 의식할 때 마음이 불편한 것만은 아니다. 머리는 만해 선생의 시 한 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도, 몸이 그 대신 작은 정성이라도 바치고 있다는 생각에 흐뭇할 때가 더 많다. 마음이 들떠 있는 날은 그 작은 일을 부풀려 이 땅의 한 역사와 내 몸이 공조하고 있다는 망상에 젖기까지 한다. 고인이 이 땅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그 흔적이 이제 내 용렬한 마음의 한구석을 조금 높은 자리로 들어올린다고 해야 할 것이다.

모든 시간이 같은 시간은 아니며, 모든 땅이 같은 땅은 아니다. 사람들은 시간을 같은 길이로 쪼개서 달력을 만들지만 어떤 날은 다른 날과 다르고 어떤 시간은 다른 시간과 다르다. 어떤 독재권력이 추석을 양력 9월18일로 바꾸고 그날에 차례를 지내라고 강압할 수는 있어도, 이 나라 사람들을 남북으로 이동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추석인 날을 추석 아닌 날과 다르게 하여, 그 많은 사람들을 제 고향으로 달려가게 하는 것은 이 나라 사람들이 이 나라의 시간 속에 쌓아놓은 기억이다.

땅이라고 다를까. 어느 부자가 어느 언덕에 아무리 호화로운 집을 지어 놓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루이틀도 아닌 오랜 세월에 걸쳐 내 고개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다. 비옥한 땅에서건 척박한 땅에서건, 사람들이 살고, 꿈꾸고, 고뇌하는 가운데, 조금 특별한 일을 실천하려 했던 기억이 한 땅을 다른 땅과 다르게 하고, 내 몸을 나도 모르게 움직이게 한다. 땅이 그 기억을 간직하지 못한다면, 이 나라 사람이 이 땅에서 반만년을 살았다 한들, 한 사람이 이 땅에서 백년을 산다 한들, 단 한순간도 살지 않은 것이나 같다. 이 말은 과장이 아니다.

이제는 다른 세상 사람이 된 소설가 홍성원 선생에게서 들은 말이 있다. 선생은 개항 무렵의 강상(江商)들에 관한 소설을 쓰려고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의 강나루를 답사한 적이 있다. 마지막 강상들과 함께 일한 사공들이 아직 남아 있을 때였다. 그러나 사공들에게 기대하던 대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강에 댐을 쌓고 하안 공사를 한 뒤 나루터가 없어지고 나니 거기서 일하던 기억도 사라지고 말았다고 늙은 사공들은 대답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살았던가. 선생은 대답 대신 한탄을 들었다.

문학 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서울에서 부지불식간에 고개를 돌려야 할 곳은 한두 군데가 아니다. 염상섭이 살던 집과 현진건의 마지막 집필실은 무사한가. 이태준의 수현산방에서는 아직도 차를 팔고 있는가. 문필가들과 마찬가지로 건축가들도 관심을 가졌을 이상의 집터는 지금 누구의 소유일까. 그리고 또, 그리고 또.

바닷가의 갯바위에는 이상한 이끼가 있다. 썰물일 때 뜨거운 햇볕 아래서는 줄기와 뿌리가 죽어 있는 마른풀처럼 보이지만, 밀려온 바닷물에 다시 적시면 순식간에 푸른 풀처럼 살아난다. 지금 서울시는 서울을 디자인하느라고 바쁘다. 그 디자인이 기억의 땅을 백지로 만들고 통속적인 그림을 그려 넣는 일이 아니기를 바란다. 마른 기억의 이끼를 싱싱한 풀로 일으켜 세우는 밀물이길 바란다.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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