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섭 책·지성팀장
1807년 괴테는 예나에서 18살 미나 헤르츨리프를 만났다. 이 정열적인 인물은 나이를 먹어서도 열정이 줄지 않았다. 쉰여덟 살의 괴테는 미나의 매력에 급속히 빠져들었다. 열정이 위험한 속도로 비등점을 넘어 끓어올랐다. 왜 하필이면 이 여자란 말인가. 그 아찔한 연애체험을 질료로 삼아 2년 뒤 쓴 소설이 <선택적 친화력>이다. 이 기묘한 소설 제목은 화학자 베르크만이 당시 막 발견한 화학 현상에서 빌려온 것이었다. 두 가지 물질을 섞어 놓으면 그 물질들을 구성하는 특정한 원소들끼리 예외없이 서로 이끌려 달라붙는다는 것이 베르크만의 화학 실험실에서 확인된 현상이었다. 베르크만은 거기에 ‘선택적 친화력’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괴테는 이 현상이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서도 그대로 발견된다는 데 주목했다. 왜 어떤 남녀는 수많은 장애물을 넘어 서로 끌어당기고 왜 어떤 남녀는 소 닭 보듯 하는가. 선택적 친화력이라는 화학 법칙이야말로 이 밀착과 배척의 인간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딱 맞는 비유였다.
괴테가 20세기에 살았더라면 화학이 아니라 생물학에서 인간관계를 설명할 적절한 비유를 찾았을지도 모른다. 1953년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발견한 ‘디엔에이 이중나선’은 선택적 친화력이 자기복제로 이어지는 세계를 보여주었다. 디엔에이 사다리 난간을 이루는 네 종류의 염기 중 아데닌(A)은 언제나 티민(T)과 결합하고, 구아닌(G)은 시토신(C)과 결합한다. 이 화학적 결합은 예외가 없다. 이 결합관계가 층층이 쌓여 꼬인 것이 디엔에이 이중나선이다. 이 이중나선은 때가 되면 지퍼처럼 열려 다른 염기들을 규칙적으로 선택해 끌어당김으로써 자기 자신을 복제한다. 이로써 자기와 똑같은 디엔에이가 무한히 번식하게 된다.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디엔에이 속 유전자야말로 모든 생명체의 진짜 주인이라고 말한다. 도킨스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도 유전자가 조종하는 탈것이나 로봇에 지나지 않는다. 남녀의 열렬한 사랑도 유전자 차원의 자기보존 충동의 결과일 뿐일지도 모른다.
도킨스의 이론 중 특히 흥미로운 것은 ‘문화적 유전자’ 가설이다. 문화적 차원에도 유전자가 있어 생물학적 유전자처럼 자기복제를 한다는 주장이다. 인간은 단순히 동물적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삶을 산다. 도킨스는 문화적 유전자를 ‘밈’(meme)이라고 부르는데, 생물학적 유전자 ‘진’(gene)을 염두에 둔 조어다. 생물학적 유전자의 특성이 자기복제에 있듯, 문화적 유전자도 자기복제가 본질이다. 어떻게든 자기를 복제해 퍼뜨리려는 이 눈먼 충동이 밈의 속성이다. 밈은 좋은 것도 복제하지만 나쁜 것도 복제한다. 도킨스는 ‘맹신’을 예로 든다. “맹신이라는 밈들은 각기 독특한 잔인한 방법을 가지고 스스로 번식하고 있다. 애국적 맹신이든 정치적 맹신이든 종교적 맹신이든 똑같다.” 맹신은 사람들을 끌어들여 그들을 맹신의 복제품으로 만든 뒤 퍼뜨린다.
파탄으로 끝난 이번 개각은 정치적 자기복제가 있다면 어떤 모습일지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임명권자의 신념과 의지, 가치관과 인생관을 그대로 빼닮은 듯한 후보자들은 문화적 유전자 ‘밈’이 한 생물학자의 재치 있는 가설이 아니라 인간 삶을 지배하는 무거운 진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강부자-고소영-거짓말 내각으로 이어지는 이 끝없는 악순환에서 선택적 친화력과 자기복제의 나쁜 사례를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다. 다음 선택은 다를까. 자기와 똑같은 것들만 끌어당겨 재생산하는 문화적 유전자 자체를 해체하지 않는 한 무망한 일이다.
고명섭 책·지성팀장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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