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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배우의 마음으로… / 박중훈

등록 2010-08-06 20:38

박중훈  영화배우
박중훈 영화배우
2003년에 개봉된 제 영화 <황산벌>에서 전 영광스럽게도 우리 역사의 충장 계백 장군을 연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황산벌에서 장렬히 전사한 우직한 장군을 표현할 기회를 얻은 저는 기쁨으로 들떠 있었습니다. 더구나 촬영하는 세트를 실제 부여 백마강 근처에 지어놓고 1000년이 훨씬 넘는 과거로 여행을 떠나 그 장군으로 살 생각을 하니 가슴 벅차고 설레었습니다. 배우가 아니었다면 꿈꿀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그것이 배우의 특권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연기를 하려고 하니 이 계백 장군은 참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었습니다. 거의 모든 장군은 가족을 지키고 살리기 위해 전쟁에 나가는 데 반해 이 장군은 가족을 죽이고 전쟁에 나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연기란 주어진 가상을 충실히 믿고 순간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배우는 완벽히 자기최면을 걸어 그 인물이 되어야만 하는데 계백 장군만큼은 도저히 이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야, 전쟁의 패배를 예감한 계백이 적의 손에 가족을 죽게 하느니 차라리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조국 백제를 위해 황산벌로 달려가 장렬히 전사한 충장이었다고 해석하면 그만이지만, 그 인물이 돼서 막상 구체적으로 연기하려는 배우 입장에선 참 황당했습니다. 계백 장군을 꿈에서라도 만날 수 있었다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왜 처자를 죽였느냐”고 한번 야무지게 따지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1남2녀와 아내를 칼로 베는 장면을 찍기 1주일 전부터 저는 새벽에 몰래 일어나 잠자는 아내와 아이들을 노려보기 시작했습니다. 저 또한 우연의 일치로 1남2녀의 아이들을 두고 있는 처지입니다. 귀엽게 새록새록 잠자는 꼬맹이 세 명과 아내를 시퍼런 장검으로 목을 쳐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막 시리도록 아파 왔습니다. 참으로 고통스러웠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생각하자니 계백 장군으로 몰입하기 어려웠고, 몰입하자니 가족 생각에 너무 슬펐습니다.

그렇게 괴로운 1주일이 지나 촬영 날짜가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은 폭우가 쏟아져 촬영이 취소돼 버리고 말았죠. 결국 그 촬영은 이미 잡혀 있는 다른 신의 촬영 일정 때문에 그로부터 한 달 뒤에나 가능했습니다. 가족들에게 미안해 계백 역에 얽힌 사연을 얘기하지도 못했던 저는 그 한 달을 1년처럼 길고 힘겹게 보냈고 그 장면을 촬영한 후 며칠 심한 몸살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계백을 이해하는 게 그토록 힘들었지만 전 결국 이해했어야만 했고 연기로 표현했습니다. 좀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배우는 살인자를 용서할 순 없어도 최소한 이해할 수 있어야 연기를 할 수 있습니다. 이해한다는 건 반드시 동의가 필요한 것만은 아닙니다. 물론 동의가 수반된다면야 금상첨화겠지만 이해한다는 것만으로도 연기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배우는 연기할 타인을 반드시 이해해야만 하는 책무가 있습니다. 전 그 책무를 오랜 시간 이행하면서 우리가 사는 실제 세상을 떠올려 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같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뜻이 맞는 사람들과 어울려 행복하게 지내기도 하지만 나와 다른 입장,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사는 수많은 사람들과도 살아가야만 합니다.

실제 우리의 세상은 무수한 충돌과 갈등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 갈등은 이념별로, 동서 지역으로, 세대별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다양한 형태로 점점 더 팍팍해져 갑니다. 저의 순진한 생각일진 모르지만, 우리 모두가 타인을 연기하는 배우의 마음으로 실제 세상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평화스러울까요.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사람과 생각에도 반드시 이해해야만 하는 역지사지의 책무를 가지고 산다면 서로를 이토록 미워하진 않을 겁니다.


가족을 죽이고 전쟁터로 향한 계백 장군을 연기했지만 끝내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명예를 지키려고 했던 그의 마음을 어려웠지만 이해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전 그렇게 계백 장군과 화해했습니다.

박중훈 영화배우 트위터@moviej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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