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섭 책·지성팀장
베스트셀러가 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결국 ‘정치란 무엇인가’를 묻는 책이다. 이 물음의 도정에서 샌델은 이마누엘 칸트와 그의 후예 존 롤스를 만난다. 칸트나 롤스는 개인의 자율과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받든다. 정치가 개인들에게 ‘이것이 좋은 삶이니 이렇게 살아라’ 요구해선 안 된다. 무엇이 좋은 삶인지 각자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정치는 개인들이 스스로 좋은 삶을 찾아서 살 수 있도록 최대한 공정한 삶의 조건을 마련해주는 데서 그쳐야 한다. 샌델은 근대정치의 표준이 된 이 자유주의 정치관이 정치에서 무언가 소중한 것을 지워버렸다고 말한다. 공동체 차원의 도덕적·정신적 추구를 빠뜨림으로써 정치가 공허한 것이 되고 말았다는 진단이다.
샌델은 2300년 전의 정치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불러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정치의 목적은 시민들에게 삶의 모범을 제시하고, 시민의 미덕을 키워 좋은 삶을 살도록 해주는 데 있다. 이때의 좋은 삶은 공동체의 운명을 함께 걱정하고 공동선을 더불어 추구하는 삶이다. 샌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받아들여, 정치가 공동체 구성원들의 도덕적 욕구와 정신적 갈망에 응답하는 것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공동체 정신을 일깨우는 일이야말로 정치가 해야 할 일이다. 남 이기고 부자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샌델의 생각은 지금 한국인들에게 확실히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바가 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가볍지 않은 정치철학 교과서가 종합 베스트셀러 최상단을 몇 주째 차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치는 말로써 이루어진다. 공동체 구성원의 꿈에 호소하는 정치가 이뤄지려면, 진정성의 언어가 필수적이다. 정치언어에 진정성을 요구하는 것은 정치언어를 구사하는 사람, 곧 정치인에게 진정성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 진정성이란 ‘내면의 목소리를 마음으로 듣고 거기에 헌신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개인의 윤리학과 공동체 정치학이 만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윤리학을 먼저 꼼꼼히 살피고, 거기에 이어 정치학을 논의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내면의 진정성을 키워 윤리적 주체로 선 사람만이 진정성의 언어를 감당할 수 있다. 말년의 미셸 푸코는 진정성의 언어를 ‘파레시아’(parrhesia)라는 단어로 포착해낸 바 있다. 고대 그리스·로마 철인들이 삶의 원칙으로 삼았던 파레시아는 ‘솔직하게 말하기’를 뜻한다. 감추지 않고, 속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파레시아다. 파레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이다. 요컨대 ‘진실하게 말하기’다. 진실하게 말하려면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파레시아는 과시욕에 휘둘리지 않고 비굴함에 짓눌리지 않는 ‘삶의 기술’이며, 자기 자신을 제대로 돌보는 일, 곧 자기 배려의 실천이다.
민주노동당이 41살 여성 정치인을 선장으로 내세웠다. 이정희 대표 체제는 한국 정치사의 새로운 실험이다. 김어준씨와 한 <한겨레> 인터뷰에서 이정희 대표가 한 말이 인상 깊다. “정치는 연출이 아니다. 정치는 결국 진심으로 하는 것이다.” 김어준씨는 이정희 대표의 파레시아에 대해 ‘이건 솔직한 게 아니라 능력이다’라고 평했다. 그 말대로 파레시아는 오랜 훈련과 시련을 거쳐 자신을 윤리적 주체로 세운 결과로 얻어지는 일종의 정신적 역량이다. 민주노동당의 새 대표 체제 출범을 계기로 하여, 우리 정치가 진정성의 언어를 되찾기를 기대한다. 진정 어린 말들이 서로 경합해 진정성의 정치를 구현할 때 국민이 그 정치에 공동체의 소망을 걸 수 있을 것이다.
고명섭 책·지성팀장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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