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섭 책·지성팀장
포르투나(fortuna), 비르투(virtu), 네체시타(necessita).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가 군주, 그러니까 공동체의 지도자에게 필요하다고 적시한 세 가지 요건이다. 마키아벨리 정치사상을 이해하는 데 관건이 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포르투나는 운·운명을 뜻한다. 운명은 두 얼굴이다. 사나운 얼굴의 악운이 있는가 하면, 환하게 웃는 행운이 있다. 운명은 불안정한 것, 알 수 없는 것이다. 운명은 험한 강물과 같아서, 한번 노하면 평야를 덮치고 나무를 뿌리째 뽑고 집을 통째로 쓸어버린다. 들판과 도시가 폐허로 변한다. 그러나 운명이 웃을 때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진다. 지도자는 이 행운의 손을 잡아야 한다. 이 대목에서 마키아벨리의 저 유명한 비유가 등장한다. 운명의 신을 손아귀에 넣으려면 신중하기보다는 과감해야 한다. 운명의 신은 여신이어서 젊은이에게 끌린다. 젊은이는 더 과감하고 더 공격적이며 더 대담하기 때문이다.
이 고색창연한 비유는 비르투의 성분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비르투는 남성을 뜻하는 라틴어 ‘비르’(vir)에서 나온 말이다. 마키아벨리는 비르투를 그 시대의 일반적인 용법과는 달리 어원에 가까운 의미로 사용했다. 그러므로 비르투는 ‘덕’이라기보다는 ‘힘’이다. 운명의 여신을 낚아채는 남성적인 힘이 비르투다. 비르투를 지닌 사람은 활력과 기백이 넘치고 결단력이 있다. 요컨대, 비르투는 육체적·정신적 역량이다. 비르투가 충만하면 악운의 범람을 막을 수 있으며 행운을 제편으로 끌어당길 수 있다. 그러나 비르투가 아무리 출중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네체시타’다. 네체시타란 시대가 요구하는 것, 시대에 어울리는 것, 곧 시대 적합성이다. 역사철학적 용어로 말하면, 시대정신이며 역사적 필연성이다. 당대의 역사가 지도자에게 요구하는 것이 네체시타인바, 이 요구를 충족시키는 지도자가 승리하고 그 요구에 미달하는 지도자는 패배한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지도자는 비르투에 더해 네체시타를 간파하는 혜안을 지녀야 한다.
커뮤니케이션학자 강준만 교수가 <인물과 사상> 최근호에서 버락 오바마의 경우를 들어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지도자의 덕목으로 ‘화합’을 지목했다. “우리는 적이 아니라 친구이며 한몸으로 뜨고 집니다.” “세계를 분열시키는 사람들, 나는 그들을 패배시킬 것입니다.” “우리 정치를 그토록 오랫동안 망쳐온 당파주의와 협소함으로 다시 빠져들게 할 유혹에 저항해야 합니다.” 이 화합의 메시지로 오바마는 대통령 선거에서 이겼다. 강 교수는 한국 역시 상황이 다르지 않다며 6·2 지방선거에서 승리한 김두관·송영길·안희정·이광재, 아깝게 진 유시민·한명숙, 그리고 다른 지도적 인물들을 거론한다. “이들 가운데 누가 승자가 될 것인가? 나는 ‘화합’이야말로 차기 대선의 새로운 시대정신이 될 것이며, 그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해내는 사람이 승리할 수 있다고 본다.”
비르투라고 해서 다 같은 비르투가 아니다. 지금 한국 사회를 폭주하고 있는 것은 거칠기 짝이 없는 시대착오적 비르투다. 천안함 사태의 진실을 밝히려는 시민사회를 적으로 몰고, 국민의 저항을 깔아뭉개며 4대강 사업을 밀어붙인다. 남북이 적대해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닫고, 집권당의 주류와 비주류가 반목해 내분으로 휘청거린다. 나라를 사분오열시키는 미성숙한 비르투, 그것이 지금 이 나라 집권세력의 모습이다. 국민은 이 분열·불화·불통에 지쳤다. 강 교수의 진단대로 화해·화합·통합이 이 시대의 네체시타임이 분명하다.
고명섭 책·지성팀장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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