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 고려대 불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산딸기 있는 곳에 뱀이 있다고 오빠는 그러지만 나는 안 속아.” 지금도 아이들이 이런 노래를 부를까. 어쩌다 부른다고 하더라도 그 부모 세대와 같은 마음으로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들은 대부분 도시 환경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고, 농촌에 사는 아이들이라 해도 이제는 복분자라는 이름으로 밭에서 더 많이 생산해내는 산딸기를 따겠다고 마을 뒷산 위험한 곳을 헤매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더구나 오늘날의 가족관계에서는 산딸기의 유혹과 뱀의 위험을 사이에 둔 오누이의 미묘한 심리적 갈등을 이해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사내아이들의 드센 모험 길에 나서는 오빠는 뱀의 위험을 들먹여서 귀찮은 누이를 떼어버리고 싶기도 하겠지만, 이참에 형과 동생의 서열을 상기시키고 남녀의 역할을 확실하게 구분지으려는 마음도 없지 않을 것이다. 오빠의 말이 물론 거짓은 아니다. 음습한 땅에서 잘 자라는 산딸기나무 덤불은 작은 동물들이 서식하기에 알맞고 따라서 뱀들이 꾀어들기 마련이다. 오빠는 그 위험한 자리에 어린 누이까지 끌고 들어갈 수는 없다. 그는 동생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
누이가 언제까지나 밝은 자리에 남아 그 행동이 훤히 파악될 수 있기를 그는 바라지만, 누이는 자신을 흥분시킬 만한 것이 그 밝은 자리에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찾아야 할 것을 찾으려면 위험 앞에서 용감해야 할 것이며, 찾아야 할 것이 위험 속에만 있다면, 그 위험이야말로 감동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다 보면, 이 오누이의 갈등은 벌써 저 정치적 근대성과 미학적 근대성의 대립을 설명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정치가 근대화를 지향할 때는 거기에는 무엇보다도 모든 삶을 환하게 드려다 보면서 백성들을 빈틈없이 다스리려는 의도가 있다. 19세기 중엽 프랑스의 오스만 같은 사람이 파리시에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벌여 낡은 시가지를 허물어 길을 닦고 새로운 건물들을 세울 때, 거기에는 산업화와 함께 불어난 인구를 수용할 수 있도록 도시를 정비·확장하자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스만으로 대표되는 정책당국은 화려한 건물과 반듯한 도로로 가난한 삶의 고통스런 흔적을 덮어 가리는 한편, 모든 동네를 구획으로 정리하여 정부에 저항하는 반란 음모자들의 근거지를 평정하기 위해 이 토목공사를 이용했다.
당시에 현대 예술을 창도했던 보들레르 같은 사람은 이 새로 정비된 도시에서 삶의 폐허를 보았다. 그는 “삶이 살고, 삶이 꿈꾸고, 삶이 고통을 견디던”, 그 어둡고 뱀처럼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광장으로 바뀐 자리에서 제 삶의 기억이 송두리째 사라져버린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제 땅에서 망명객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밝고 깨끗하고 번쩍거리는 폐허에서는 어떤 감동스러운 일도 일어날 수 없다. 현대 예술은 이 도시라는 이름의 폐허에서 사라진 기억을 복원하는 일로부터 출발한다.
똑같은 일이 우리의 정치적 근대화에서도 벌어졌으며, 여전히 진행중이다. 박정희 시절의 새마을운동은 잘살기 전에 못살았던 흔적을 시멘트로, 슬레이트로 덮는 일부터 시작했다. 청계천을 복개하여 그 시궁창을 거기 그대로 남겨둔 채 감추었다. 모든 것이 환해졌다. 그 후 청계천은 다시 열렸지만 그것이 감춰진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개천이 긴 어항으로 바뀌었을 때, 거기 등을 붙였던 중소상인들의 삶도, 한국 예술에 새로운 감수성을 불어넣던 언더그라운드 예술의 터전도 함께 사라졌다.
정부는 이제 모든 강을 빈틈없이 다스리겠다고 전 국토에 토목공사를 벌이고 있다. 이른바 4대강 사업이다. 뱀처럼 구불구불한 강은 이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 구불구불한 뱀이 삶에 미치던 위험은 아마 사라졌을 것이다. 그 전에 강의 삶도, 거기 몸 붙였던 생명의 삶도, 사람의 삶까지도 사라지고 없을 테니까 말이다. 뱀이 없는 곳에는 산딸기도 없다.
황현산 고려대 불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황현산 고려대 불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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