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섭 책·지성팀장
“우리는 갓난아기에 대해 지배자라기보다는 노예에 가깝다.” 일본의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은 <탐구>라는 제목의 철학적 탐구서에서 우리의 통념을 확 뒤집는 발언을 한다. 왜 노예인가?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갓난아기에게는 명령하는 것도 지시하는 것도 통하지 않는다. 아기는 먼저 말을 알아들어야 하고, 그러려면 아기에게 말을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가르치는 것’은 내가 강요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가르침이 성립하려면 상대방이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쪽이 위에 있고 배우는 쪽이 밑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태는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둘 사이의 권력관계를 보건대 가르치는 쪽이 약한 처지에 있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로 가라타니가 말하려는 건 ‘대화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대화란 단순히 ‘말하다-듣다’의 관계가 아니라 ‘가르치다-배우다’ 관계라는 것이 요점이다. 언어와 생각과 정서를 공유한 상태에서 한쪽이 말하고 다른 한쪽이 듣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대화라고 하기 어렵다. 그런 대화는 자기가 자기에게 말하는 것, 곧 자기대화, 모놀로그일 뿐이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 우리말을 한마디도 모르는 외국인, 이렇게 말이 통하지 않는 ‘타자’에게 말을 가르친다고 생각해보자. 소통의 공통 지반이 없는 상태에서 말로써 관계 맺는 것, 대화란 이런 난감함을 이겨내는 작업이다. 러시아 문학이론가 미하일 바흐친은 말이란 독백이 아니고 대화임을 강조하면서 그 말이란 것을 다리에 비유한다. “다리의 한쪽 끝은 나에게 놓여 있고 다른 한쪽 끝은 상대방에게 놓여 있다. 말이란 바로 두 사람의 공통 영토인 셈이다.” 이때 대화란 다리를 건너는 일인데, 가라타니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대화는 다리가 없는 곳에서 ‘목숨을 건 도약’을 감행하는 일이다. 언어게임의 규칙이 없는 곳에서 규칙을 만들어가는 그 ‘도약’이 대화다. 말에 대한 ‘철학적 탐구’의 선구자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말년에 탈고한 책에서 언어로 이루어진 도시를 그려 보인다. 이 언어-도시는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뉘어 있다. 낡은 건물, 미로 같은 골목길이 얽힌 구시가지 바깥으로, 큰길이 죽죽 뻗고 새 건물들이 높이 솟은 신시가지가 둘러서 있다. 신시가지가 수학 언어나 컴퓨터 언어처럼 누구나 공유하는 공통 언어를 가리킨다면, 구시가지의 얽히고설킨 길과 집은 개인의 내밀한 욕구와 정서를 품은 언어를 가리킨다. 대화란 바로 이 오래된 언어들 사이의 만남이다. 만약 상대방 언어의 이 거리와 풍경이 친숙하다면, 그 상대방과 교감하기는 그만큼 쉬울 것이다. 여기서 잡히는 것이 바로 ‘코드’다. 코드란 ‘언어의 공통 규칙’이다. 이 코드를 공유할 때, 상대방의 정서나 욕구를 느끼고 읽어내는 데 드는 신경에너지를 줄일 수 있다. 코드의 경제학이라 부를 만한 상황인데, 바로 이 경제학적 절약 요구 때문에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뜻이 통하는 사람들하고만 어울리려고 한다. 그런데 가라타니는 이런 언어의 경제학이 진정한 대화를 막는다고 말한다. 코드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 코드의 불일치를 딛고 성립하는 것이 대화이기 때문이다. 지방자치 선거를 앞두고 범야권 연대 논의가 지지부진했던 것도 코드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바 적지 않았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코드를 공유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대화의 길을 뚫는 지독하게 어려운 작업을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하다. 그 힘든 작업을 회피한다면 대화는 언제나 대화의 형식을 빌린 모놀로그에 그치고 말 것이다. 고명섭 책·지성팀장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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