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남편, 사랑에 빠지다 / 박어진

등록 2010-05-07 21:56

박어진 서울셀렉션 기획실장
박어진 서울셀렉션 기획실장




금요일 늦은 오후, 남편에게서 날아온 문자메시지. “이박삼일 보현산 별빛축제 갑니다. 즐거운 주말 되삼.”

그는 사랑에 빠졌다. 지구 바깥, 아니 태양계 너머 머나먼 우주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버렸으니 말이다. 지난가을 어렵사리 장만한 지름 12인치 반사망원경에 동네 이름을 따서 ‘평광 리바이어턴’이란 이름을 붙이더니, 급기야 주말마다 대구 집을 떠나 보현산천문대 부근에 진을 친다. 거의 매번 같이 움직이는 구미의 윤 과장, 경주의 박 교수 내외분과는 이제 절친 관계. 주중 내내 긴밀히 교신하면서 주말에 보현산천문대 부근이나 옥성휴양림 등으로 집결할 계획을 짠다. 가족과 마주앉은 식탁에서도 별똥별이 쏟아지는 한밤의 우주쇼나 새롭게 관측한 항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남편의 눈빛은 가장 싱싱하다. 그는 행복해 보인다.

30대 후반에 백내장 수술을 했던 남편. 40대 초반에는 당뇨병 판정을 받았다. 가족력이 있기는 하지만, 과도한 스트레스가 발병의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의사는 말했다. 그 스트레스라는 게 직장의 업무압박과 인간관계로 인한 것뿐이었을까? 본의 아니게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어깨에 걸머진 책임의무, 매사에 악악거리는 처자식에게 가장 노릇 하기의 어려움을 빼놓고 말할 수 있을까? 맞벌이를 한답시고 남편에게 줄곧 설거지를 시키고 집안일 분담을 강력히 요구했던 나. 그러고 보니 켕기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결국 그의 발병에 나는 책임이 있었다.

많이 걷고, 과식을 피하라는 의사의 조언을 남편은 충실히 따른다. 그런데도 체중이 줄어들고, 머리숱은 엷어졌다. 눈가의 잔주름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피부도 꺼칠해졌다. 당뇨병에 뒤따라 갱년기가 온 것이다. 그러다 만난 것이 망원경과 딥 스카이였다. 어릴 적부터 별 보기를 좋아했던 남편은 목성의 한 위성 이름을 따서 우리 첫아이 이름을 지었다.

하지만 한동안 잊고 살았던 우주였다, 지구에서 살아온 55년의 삶, 그중 25년의 결혼생활,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나름 즐겁고 행복했겠으나 때로 어찌 쓸쓸하지 않았을까? 이제 망원경을 손질하고 천체관측 책을 들여다보며 새로 사귄, 스타쇼 동아리 절친들을 만날 궁리에 바쁜 그를 바라보는 나는 즐겁다. 아니, 안심된다. 그는 내 남편이기에 앞서 자유로워야 할 인간이고 개인이 아닌가? 오늘 밤도 우주 산책에 나선 남편. 그는 알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우주 속 한 점 먼지같이 작은 우리 존재의 크기를. 또한 지상에서의 생애가 한낱 배역이며 우리가 누리는 온갖 성취, 기쁨과 애달픔이 잠시 걸친 옷 한 벌일 뿐이라는 것을. 우주의 관점으로 지상의 일들을 보게 된 덕분일까? 요즘 남편은 신이 났다. 그리고 한결 더 다정하다. 광대무변한 우주 속 한 점 물방울 같은 지구에, 그것도 모국어를 공유하며 동시대에 태어나, 가족으로 만난 인연은 문자 그대로 우주적일 테니 말이다.

결혼 전에 “노벨상을 탄 최초의 한국인이 되겠다”고 뻥치던 남편. 요즘 그의 행태를 보면 내가 노벨상 수상자의 부인이 되기는 글렀다. 아니 노벨상 같은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가 즐겁게 갱년기를 건너기를 바랄 뿐이다. 남편은 올해 여름휴가에 남반구인 호주로 남십자성을 보러 가는 야심찬 계획을 세운 모양. 온라인 동호회원들과 접촉이 잦다. 여행 예산 때문에 눈치가 보이는지, 내게 미리 양해를 구하기도 한다. 총각 시절 첫사랑 우주와 사랑에 빠진 그를 어찌 축복하지 않겠는가? 남십자성 관측 여행에 처자식 일동은 압도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흐뭇해하는 남편. 그가 오래 행복했으면 좋겠다.


박어진 서울셀렉션 기획실장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 “간첩 싹 잡아들이라 한 것” 누가 믿을까? [2월5일 뉴스뷰리핑] 1.

윤석열 “간첩 싹 잡아들이라 한 것” 누가 믿을까? [2월5일 뉴스뷰리핑]

[사설] 속속 드러난 ‘윤석열 거짓말’, 언제까지 계속할 건가 2.

[사설] 속속 드러난 ‘윤석열 거짓말’, 언제까지 계속할 건가

헌법이 구타당하는 시대 [세상읽기] 3.

헌법이 구타당하는 시대 [세상읽기]

윤석열 파면되면 국힘 대선후보 낼 자격 없다 4.

윤석열 파면되면 국힘 대선후보 낼 자격 없다

민주주의 흔드는 ‘레드 콤플렉스’ [하종강 칼럼] 5.

민주주의 흔드는 ‘레드 콤플렉스’ [하종강 칼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