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애 사람팀장
5월은 봄바람보다 앞서 날아온 청첩장들로 시작되는 듯하다. 장동건-고소영 두 선남선녀 스타의 영화 같은 결혼식이 사진 구경만으로도 즐거웠다면, 집안에서는 개혼인 큰조카의 결혼식을 앞두고 가족들 모두 잔치 준비에 들떠 있다. 어릴 적 내가 쓴 어린이 관련 기사에 사진 모델로 등장했던 녀석이 어느새 자라 가장이 된다니, 머지않아 ‘고모할머니’가 될 수도 있겠지, 내심 마음의 준비를 하며 새삼 세월의 더께를 실감하는 요즘이다. 올해 서른살, 갓 태어난 녀석의 투명한 눈빛에 빠져 난생처음 학교 가기가 싫었던 1980년을 추억하다 ‘5월 광주’를 떠올렸다. 30돌, 어느덧 한 세대 이전의 역사가 됐구나. 그사이 5·18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크게 바뀌었다. ‘광주사태’는 ‘광주민주화운동’을 거쳐 ‘5월 민중항쟁’으로, ‘폭도’로 매도당했던 시민들은 ‘민주투사’와 ‘민주화 유공자’로, ‘반란의 도시’로 낙인찍혔던 광주는 ‘민주화 성지’로 격상됐다. 1988년 국회 광주청문회를 시작으로 95년 문민정부에 의한 관련 특별법 제정과 ‘12·12쿠데타’ 주범 전두환·노태우 전직 대통령 구속, 97년 희생자 보상·묘역 성역화·국가기념일 지정 등으로 형식적이나마 명예회복이 이뤄졌다. 역사 교과서에도 ‘5·18민주화운동’으로 실리게 됐다. 하지만 그 후 10여년 민주정부의 집권 동안 5·18은 차츰 사회적 관심권에서 멀어져 갔다. 희생자와 유가족들에게 보상금이 지급되면서 어쩌면 ‘살아남은 부채감’이 그만큼 덜어진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게 5·18은 과거 군사독재 시절 광주·전남 지역의 불행했던 사건의 하나로 축소돼 갔다. 2007년 <화려한 휴가>의 대중적 흥행 성공은 특히 80년 이후 태어난 젊은 관객들이 ‘5월 그날’을 잘 모르고 있었다는 방증으로 풀이되기도 했다. 급기야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또다시 5·18을 좌익난동으로 왜곡하는 일부 극우세력의 억지 주장까지 공공연히 나돌고 있다. 이달부터 <한겨레>의 ‘길을 찾아서’에서 ‘5·18 30돌 특집-5월을 지켜온 여성들’을 연재하고 있다. 80년 이후 30년 동안 줄기차게 이어진 민주화운동의 원천이 바로 ‘5월 정신’이란 사실을, 지금까지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여성들의 활약상과 기억을 통해 다시금 밝히려는 것이다. 연재 기획을 위해 만난 ‘5·18’ 여성들은 아직도 그날의 참혹한 기억과 부상, 고문 후유증 등으로 ‘5월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라고 털어놓았다. 몇푼의 위로금이나 번쩍이는 훈장으로는 결코 치유될 수 없는 고통과 분노 때문이라고들 했다. 그럼에도 민주화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버텨올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날 우리는 아름다웠다. 죽음도 두렵지 않은 일체의 순간, 그것은 사랑이었다.” 지난주 불임암 후박나무 아래 한 줌의 유골로 돌아간 법정 스님이 75년 인혁당 사건 직후 돌연 은둔하게 된 이유와도 한자락 맥이 닿는 얘기다. “어느 날 내 안에 (독재자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가 쌓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천안함 침몰의 원인도, 증거도, 밝혀지지 않았는데도 무조건 ‘북한의 짓’으로 몰고 가며 보복·응징을 선동하는 보수언론의 ‘증오 마케팅’이 극성이다. 이에 슬금슬금 맞장구를 치며 ‘6·2 지자체 선거’ 때까지 안보 정국으로 끌고 가려는 대통령과 집권여당의 뻔한 수는 더욱 우려스럽다. 전쟁이라도 하려는 셈인가. 지금 지도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어느 때보다 잔인한 봄을 견디고 있는 국민들의 스산한 마음에 5월의 햇살 같은 ‘희망’을 되살려주는 것이어야 한다. 김경애 사람팀장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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