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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이상한 봄 / 박범신

등록 2010-04-23 19:07

박범신 작가·명지대 교수
박범신 작가·명지대 교수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으리, 라고 셀리는 노래했다. 그러나 올봄은 여느 봄과 달랐다. 여간해서 봄이 오지 않았다. 뜰 앞의 매화가 거의 한달 넘게 꽃망울만 맺힌 채 추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봄꽃 같은 젊은 목숨들이 물속에서, 하늘에서 떼죽음을 당한 것도 그 기간이다.

밤 깊어 반취 상태로 택시를 탔는데 늙수그레한 기사의 운전 솜씨가 사뭇 거칠다 싶더니 세검정 신호대기에서 그만 앞차에 부딪칠 뻔하면서 아슬아슬 멎었다. “젊지도 않은 분이 왜 그렇게 차를 거칠게 몰아요?”라고 내가 타박을 했다. “그러게요. 요즘 내내 혼이 나간 것 같아요. 늦둥이로 본 아들이 해군에 입대해서 배를 타고 있거든요.” 기사가 뒤를 돌아보며 꾸벅하고 사과를 했다.

어찌 ‘배를 탄 해군’의 아비뿐이겠는가. 아이를 군에 보낸 모든 부모 심정이 쉽게 오지 않는 봄을 기다리며 모두 뒤숭숭했을 것이다. “군대 안 간 높은 양반들이 많다는 말도 들리는 터에, 바다 밑에 가라앉은 군인들 시신도 못 건지고, 밤늦으면 부어라 마셔라 술 취한 손님들만 천지고 하니, 마음이 영 잡히질 않더라구요.” “그럴 만도 하네요. 내 아이들은 두 놈 다 제대했는데도 영 밥맛이 나지 않던걸요. 술 취한 손님들도 모두 가슴 아파서 술 마신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위로 삼아 한마디 했더니 기사의 얼굴이 금방 환해지며 “아드님은 육군으로 복무했나요? 어디서 뭐로 복무했나요?”라고 연거푸 묻는다. 아들들이 입대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렇게 금방 친밀감과 함께 동지적 연대감까지 느끼니 참 신기했다.

천안함 사건 후 위로와 함께 박수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어디 한둘일까마는, 제일 큰 박수를 받아야 할 분들은 바로 숨진 젊은이들의 유가족일 것이다. 그분들이 구조작업 중 또다른 희생이 생길까봐 무리한 구조작업을 중단해 달라고 스스로 요청했을 때 나는 정말 큰 감동을 느꼈다. 개발의 가파른 질주를 거듭해온 역사 속에서 어쩌면 우리가 다 잃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고유한 인간적 가치들이 아직도 굳건히 남아 있다는 사실에 새삼 ‘살아갈 힘’이 나는 기분이었다. 아하, 우리 모두 진정 함께 살고 있구나, 혼자가 아니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뉴스를 보니, 시신을 찾은 유가족들은 ‘시신’들이 좀 상할지라도 아직 찾지 못한 장병들의 시신을 찾아 함께 장사 지내자 하고, 다른 분들은 찾은 시신부터 수습해 편히 보내야 한다고 하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자식이 목숨을 잃었는데도 중요한 고비마다 이기주의적 배타성을 버리고 우리가 너나없이 ‘한 배’ ‘한 택시’에 타고 있다는 존엄한 사실을 상기시켜준 유가족들이 봄꽃보다 더 아름답다. 바야흐로 자식과 아버지, 또는 배우자를 잃은 유가족들에게 국민과 정부가 오히려 위로받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이제 수습은 정부의 몫이다. 온갖 ‘설’이 난무하지만 진실은 끌어올린 함미의 끊어진 부분에 덮인 그물 안에 있다.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 끝내 알 수 없다면 유가족은 물론 온 국민의 불안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불안은 유가족들이 보여준 인간적 가치에 따른 연대감조차 차츰 무화시킬 게 뻔하다. 그런 의미에서 군사기밀을 앞세워 군과 국민을 따로 떼어놓으려는 시도는 없을 것이고 없어야 한다. 필립 시드니는 “용장(勇將)은 뿌리와 같은 것으로서 거기서부터 가지가 되어 용감한 병졸이 나온다”고 말한 바 있다. 죽은 젊은이는 물론이고 살아서 이 땅을 지켜갈 다른 이들들을 위해서도 군 수뇌부와 정부는 명백하게 진실을 밝혀 그들이 단단하고 믿을 수 있는 “뿌리”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차례가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

꽃이 피었지만 어쩐지 아직도 봄이 다 온 것 같지 않은 이상한 2010년 봄이다.


박범신 작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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