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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스물일곱살 비정규직 딸에게 / 박어진

등록 2010-04-09 19:27

박어진  서울셀렉션 기획실장
박어진 서울셀렉션 기획실장




이오, 함께 입사했던 동료의 갑작스런 퇴사에 네 마음도 따라 흔들렸다는 걸 안다. 비정규직으로 입사한 지 6개월, 초과근무 수당 없는 야근과 주말근무가 잦아 피로가 누적되고 있는 터에 단짝 동기를 떠나보냈으니 마음 한구석이 텅 비었겠지. 더구나 최근 너보다 두 살 아래 정규직이 새로 사무실에 들어왔다니, 착잡한 마음, 미루어 짐작한다.

대학시절 학점 관리에 유난히 대범한 척, 스펙 쌓기에 젊음을 낭비할 생각이 없다고 큰소리치더니 급기야 웬만한 기업체 입사 서류 심사를 통과하지 못해 면접시험 치를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너. 휴학 일년을 포함해 5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고 백수 겸 시간제 알바 경력 일 년을 꼬박 채운 뒤에 간신히 구한 일자리가 바로 네 모교 국제협력실이라는 사실이 참 신기했지. 300여명 외국인 학생들이 들어 있는 기숙사 관리를 맡게 되었다며 무하마드, 압둘라, 앤드루, 블레자같이 낯선 이름의 학생들 이야기를 술술 늘어놓는 너는 전에 없이 활기 넘치더구나. 아시아, 아프리카, 아랍권과 유럽, 남미까지 전지구적으로 유학생들을 받아들이게 된 대학에서 외국인 학생들을 뒷바라지하는 최일선 창구 업무는 딱 네게 맞는 일이지 뭐니. 변변한 어학연수 한번 다녀오지 못했지만 네 영어는 이미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 매끄러운 영어회화 실력보다 더 중요한 건 상대의 마음을 읽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고, 이미 우리 사회의 일부가 된 손님학생들의 입장을 헤아리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려는 서비스 마인드일 테니 말야. 사람 만나는 일을 좋아하고, 헤헤 잘 웃고, 할머니부터 갓난아기까지 모든 세대와 소통 가능한 네 특장점을 맘껏 발휘해 보렴. 새벽까지 이어지는 야근과 주말근무 속에서도 네가 웃고 있으니 나는 안도한다.

하지만 이미 이 시대의 카스트가 된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신분 장벽이 네 사무실이라고 예외는 아닐 터. 일의 내용이나 업무 강도는 차이가 없는데도 알게 모르게 차별받는 처우에 의기소침해질 게 분명해. 더구나 승진 같은 건 꿈도 못 꾸겠지. 때로 정규직들에게 모멸감을 느낄 경우가 왜 없겠니?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를 묻기보다 정규직인지 비정규직인지를 먼저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당혹스럽기도 할 거야.

그런데 이오, 지금 네가 원하는 것을 일찍 얻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큰 행운일 수도 있단다. 지금 네가 서 있는 곳, 비정규직이라는, 일종의 변두리 신분이 제공하는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렴. 비정규직의 절망과 사회적 약자의 눈물을 맛보면서 말이야. 그뿐만 아니라 청년실업이나 빈부격차 같은 사회적 폭력으로 상처받고 배제되는 영혼들을 목격하고 기억해야 해. 한마디로 말해서 이 세계를 깊고 넓게 바라보라는 말이야.

이오, 지금 하는 일에 대한 네 열정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칸막이쯤 가볍게 뛰어넘어 버린다는 것을 안다. 일 저지르기 좋아하는 네가 기획했다는 5월 체육대회는 외국인 대학생들과 부천의 한 초등학교 학생들이 함께 뛰고 친해지는, 재미난 다문화 운동회가 될 것 같더구나. 이미 알고 있겠지만 네가 언제나 자랑하는, 유능하고 유머 넘치는 선후배들과 일하는 행운에 감사하길 바라, 엄마가 만날 되풀이하는 잔소리 기억하지? 사람들 속에서 즐겁게 살아가라는 것 말이야. 아무리 능력 있는 사람이라도 혼자서 먼 길을 가기는 어려운 법이잖니? 지금 그곳 동료들과 함께 일하고 같이 밥 먹고 성과물을 나누며 팀으로서 오래오래 일하길 바라, 그것이 바로 “남의 성공을 돕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네 오랜 꿈을 이루게 해줄 테니 말이야.

박어진 서울셀렉션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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