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 작가·명지대 교수
나는 좌인가 우인가. 요즘 새삼스럽게 내게 묻는다. ‘좌파 정권’에 ‘좌파 판사’ ‘좌파 교사’를 넘어 ‘좌파 스님’ 이야기도 화제가 되니 지레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좌파 이념교육이 성폭행을 발생시킨다’느니, ‘좌파 스님을 그냥 둘 거냐’ 하는 이상한 문장들에게 자꾸 목이 졸리는 느낌도 든다. 나만 그렇겠는가. 모든 보통사람들도 이런 말을 상시적으로 듣다 보면 나는 좌인가 우인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좌인가 우인가. <한겨레>에 칼럼을 단골로 쓴다고 해서 좌파로 보는 사람도 많다. 한겨레를 좌파라고 특별히 생각한 적도 없는데, 심지어 무조건 그렇게 생각해버리는 소아병적인 사람들을 만나면 매번 당황스럽다. 그렇다고 우파 성향이라고 회자되는 <조선>이나 <동아>엔 글을 안 쓰는 것도 아니다. 작가로서 나에게 신문은 다양한 층위의 독자와 만날 수 있는 ‘발표지면’이다. 모든 사람을 좌우로 줄세우려는 이런 세상에서, 나는 ‘기회주의자’ 혹은 ‘회색분자’라고 욕먹기 딱 알맞다. 그래도 자유로운 작가의 이름으로 살기를 꿈꾸는 나로서는, ‘회색분자’라고 욕먹는 것이 하나도 두렵지 않다. 아니 오히려 소리 높여 ‘나는 회색분자요!’라고 배차기로 말할 수도 있다. 문학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작가들은 이분법으로 딱 쪼갤 수 없는 인생이라는 ‘회색지대’를 근원적인 텍스트로 삼고 살아가도록 운명지워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전근대의 절대주의적 가치가 무너진 폐허에서 태어난 현대문학의 태생으로 볼 때, 작가는 어쨌든 양지가 아닌 그늘, 중심이 아닌 변방, 충만이 아닌 결핍에 우선순위를 놓을 수밖엔 없다. ‘그늘’과 ‘변방’을 옹호하면 좌파인가. 그렇게 여긴다면 작가는 모두 ‘좌파적’이라고 할 만하다. 심지어 ‘우파 작가’로 알려진 작가의 작품도 보라. 가난한 사람, 억압받는 사람, 소외된 사람 등을 중심으로 상처와 고통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거의 모두, 다분히 ‘좌파적’이다. 한마디로, 지겹다. 정치인들이나 권력층이 끝없이 확대재생산해내는 ‘좌우론’은 기득권층인 그들에겐 ‘패거리’를 확대하고 단도리하는 데 좋은 전략일지 모르나 보통사람들에겐 그저 피로감을 가중시킬 뿐이다. 먹고살기도 힘들고, 정파·신분·세대·지역에 따른 온갖 분열이 삶을 더 팍팍하게 하는 참에 ‘나는 좌인가 우인가’를 물어 어딘가에 줄을 잘 서야 한다는 강박을 주는 사람들에 의한 정치가 어찌 공자님이 말한바, 근자열 원자래(近者說 遠者來), 가까운 자가 기뻐하고 먼 데 있는 자가 찾아오는 세상을 만들겠는가. 정치란 거칠게 말해서 인간이 가진 최저층의 본능에 따른 욕망들을,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양식으로 잘 분배하고 조율하는 인본주의적 기술이다. 그 기술의 범위 안엔 풍속도 있고 이념도 있고 제도도 있다. 풍속의 변화를 좇아 제도를 바꿔 나가자는 생각을 일반적으로 ‘진보’라 하고, 풍속이 제도와 멀어질 때 제도로써 풍속을 제어하자는 생각을 보통 ‘보수’라고 한다. 정치를 인본주의적 기술이라고 전제하면 뼛속까지 보수, 뼛속까지 진보는 절대주의를 낳을 뿐이다. 보수 속에 진보도 있고 진보 속에 보수도 얼마든 있을 수 있다. 더 과장한다면 우 속에 들어 있는 좌가, 좌 속에 깃든 우가 정답이 뚜렷하지 않은 인생을 더 참되게 대변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런 점은 80년대 이후 웬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으며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것을 모르거나, 알면서도 한사코 모르는 체 우기면서 아직도 좌우를 갈라 국민들을 줄세우려는 그룹은 정치그룹이나 일부 기득권 그룹밖에 없다. 아직도 ‘좌우’를 소리 높이 외치면 뭔가 얻을 수 있다는 전략이 유효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무지 혹은 꿍꿍이속이 참 놀랍다. 박범신 작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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