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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당신의 학교는 다양한가 / 박찬수

등록 2010-02-17 20:35

박찬수 부국장
박찬수 부국장
외고 입시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였던 서울 변두리 중학교에서 첫 외고 합격생이 나왔다.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학원 교습 한번 받지 않고 혼자 영어를 공부한 아이였다. 외고에선 이 아이에게 장학금을 주겠다고 했다. 월 30만원 안팎, 적지 않은 돈이다. 하지만 아이의 집이 학교에서 너무 멀었다. 아이는 기숙사에 들어가길 원했지만, 월 70만원의 기숙사비를 낼 수가 없었다. 외고를 가야 하나 포기해야 하나, 아이와 어머니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얼마 전 교사 아내를 둔 친구로부터 들은 얘기다. 이게 ‘소외계층에게도 수월성 교육의 기회를 보장하겠다’는 정책의 현실이다. 정부는 지난달 외고 입시제도를 바꾸면서 ‘신입생의 20%는 사회적 배려 대상자로 반드시 채우도록’ 의무화했다. 하지만 형식적 규정만으로 가난한 집 아이들이 제대로 외고를 다닐 수는 없다. 각종 잡부금이나 기숙사비가 훨씬 많이 드는 학교에서, 수업료 면제만으로 ‘교육기회의 평등’을 보장했다고 주장하는 건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이다.

비슷한 제도는 공정택 전 서울시교육감 시절에 개설된 2곳의 국제중에서 이미 시행됐다. 귀족학교란 비판을 잠재우기 위해 신입생의 20%를 ‘사회적 배려 대상자’로 뽑도록 했다. 하지만 이렇게 입학한 아이들의 상당수는 월 30만~40만원의 수업료를 내면서 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한다. 서울시교육청은 제도만 만들어놓고 나 몰라라 하고, 학교 쪽은 재정 악화를 이유로 일부 학생의 수업료 납부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교육은 사회적으로 계층 이동을 보장하는 통로 구실을 한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은 교육의 이런 측면을 표현한다. 계층 이동이 활발할수록 사회는 건강해진다. 외고가 자꾸 논란이 되는 근본 이유도 여기 있다. 사교육 조장이니 과중한 학습부담이니 하는 비판을 한꺼풀 들춰보면, 잘사는 집 아이들이 외고를 가고 그걸 발판으로 명문대로 진학하는, 그래서 교육을 통한 부의 대물림이 굳어지는 현실에 대한 강한 반발이 담겨 있다.

외고만 그런 게 아니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총장 재임 시절 4000억원의 학교발전기금을 모았다는 어윤대 전 고려대 총장이 <한겨레> 인터뷰에서 대학의 상업화 논란에 “미국 대학을 보더라도 기금 규모와 학교 순위는 정비례한다”고 반박한 건 그래서 안타깝다. 그가 진정 자랑스럽게 내세웠어야 할 건 발전기금 액수가 아니라, 총장 재임 동안 소외계층 아이들이, 서민과 중산층 자녀가 얼마나 더 많이 학교에 들어왔는지가 아닐까. 고려대나 연세대가 발전기금으로 교수를 늘리고 연구시설을 개선하는 동안, 재학생의 계층별 비율은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다.

미국 버지니아대학의 존 캐스틴 총장은 20년간 재직하면서 40억달러의 기금 모금운동을 벌이고 여성과 소수인종 입학을 확대한 걸로 유명하다. 하지만 저소득층 학생 비율은 미국 주립대학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오는 8월 총장직에서 물러나는 그는 몇 해 전 <뉴욕 타임스>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유층 출신 학생의 비율이 높아져 버렸다. 이게 내 총장 재임 시절의 유산으로 남지 않도록 애쓰고 있다.”

외고도 그렇고, 발전기금 모금에 사활을 거는 대학도 그렇고, 모두 ‘세계적 경쟁력’을 강조한다. 학생의 계층별 다양성을 얼마나 확대했는지 내세우는 학교는 없다. 내 기억으론 서울대를 제외하곤 이런 자료를 본 적도 없다. 국회의원들이 고교별 대학합격자 자료만 받아내려 애쓸 게 아니라, 소득수준별 재학생 분포와 그 추이를 제출받아서 공개하면 어떨까 싶다.

박찬수 부국장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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