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어진 서울셀렉션 기획실장
한달에 한번꼴로 하던 머리 염색을 석달 전 그만두었다. 흰머리 커밍아웃이라고나 할까. 그간 꼭꼭 숨겨왔던 희끗희끗한 머리칼은 더는 새치라고 우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그만 염색약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 줘야 할 때다. 염색을 중단하자마자 흰 머리칼은 욱일승천의 기세로 머리를 뒤덮고 말았다. 머리를 자르러 동네 미장원에 갔더니 원장님은 눈을 크게 뜨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굳이 나이들어 보이려 애쓸 필요는 없잖아요?” 온 나라가 젊어 보이기 경연대회를 여는 와중에 시대를 역행하는 나의 처사를 경고하시는 듯한 어조로.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다. 젊어 보일 뿐 젊은 건 아니라는 사실을 친절히 일깨워 주는데도 말이다. 너나없이 젊어 보이려 안간힘을 쓴다. 언제부터 나이듦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약점이 되어 버렸을까? 일터에서 밀려나지 않으려 외모를 가꾸는 풍조가 대세란다. 나이를 감추려 피부관리를 받고, 나잇살 증가를 막으려 헬스클럽에서 강제 운동을 일삼기까지 한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머리칼 속 새치를 꼭꼭 숨겨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내 머리칼에게 미안해졌다. 억지로 머리 색깔을 덧칠한다는 게 일종의 폭력 같아서다. 생각해 보면 진짜 폭력은 나이듦을 주눅들게 하는 사회 분위기다. 거기다 살짝 더 억울한 건 젊음이 끝난 뒤에도 남성의 흰머리는 연륜과 경륜으로 연결되는 데 반해 여성의 흰머리는 미모의 종식을 뜻할 뿐이라는 사실.
나이듦은 도대체 즐거울 수 없는 일일까? 돌이켜 보면, 내 몸속에 들끓는 에스트로겐과 온갖 호르몬의 지배하에 있던 젊은 날, 나는 감정의 심한 기복에서 비롯된 조울증으로 괴로웠다. 갖은 변덕으로 주위 사람들을 괴롭혔음은 물론이다. 갱년기를 거치며 호르몬들의 장난질로부터 놓여난 지금, 나는 젊은 날들보다 더 명랑하고 평화로워졌다.
그리고 드디어 나는 50대 중반 여성의 관점을 갖게 되었다. 이건 제아무리 총명한 20대, 30대와 40대라도 엄두내지 못할 독보적인 안목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세상은 나이만큼 보이는 법. 이 행성에서 아시아인으로, 분단된 나라의 한국인으로, 여성으로 거의 55년을 살아낸 건 만만찮은 역량 축적을 의미한다. 서너 군데 직장을 거치며 30년을 일했고 아내로서, 두 아이의 엄마로서, 거기다 시부모와 친정부모, 양쪽 집안의 형제자매들과 조카들 속 대가족의 구성원으로서, 나는 다양한 역할 속에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그러고 보니 젊었을 때는 몰랐던 게 너무 많았다. 이제 젊은 친구들이 별 악의 없이 무례한 실수를 저질러도 나는 섭섭하지 않다. 화내지 않고 그들에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 나도 그 나이에는 그들처럼 별 생각 없이 온갖 무례를 자행했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젊지 않음은 지혜이고 내공이다. 내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알게 된 것도 나이 덕분이다. 햇빛과 비, 바람과 서리를 겪은 늙은 호박의 의젓함으로 초여름 아침의 신선함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 있게 됐으니.
앞으로 나이가 더 들어 갈수록 젊음이 도저히 들여다볼 수 없는 60살의 관점, 70살의 관점, 80살의 관점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젊지 않음의 즐거움이 만만찮다. 새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더 있다. 아름다움을 젊음이 독점하지는 않는다. 젊지 않되 아름답기, 도전해볼 만하다. 야호! 모든 준비가 다 되었다. 이제 소금에 후추를 뿌린 듯 희끗희끗한 머릿결을 신나게 휘날려 볼 참이다.
박어진 서울셀렉션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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