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 고려대 불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젊었을 때 중국 무협소설을 키 높이로 쌓아놓고 읽은 적이 있는데, 연전에는 미국 드라마를 보느라 여러 밤을 지새웠다. 미국은 나라가 커서 좋겠다! 500기가 외장 하드에 가득 찬 드라마를 다 보고 나서 내가 지른 탄성이 이것이다. 드라마에 투입된 막대한 물량에만 감탄한 것은 아니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줄거리, 이중 삼중으로 얽혀 있는 음모, 가까운 거리 먼 거리에서 숨 돌릴 사이도 없이 일어나는 사건들, 거대하고 층층으로 연결된 재난과 그 안에서 엇갈리는 개인의 운명들, 이런 모든 것을 한국 사회에 옮겨 놓을 수도 없지만, 옮겨 놓더라도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상상하기 어려운 것을 상상하기 위해서도, 그것을 관객 앞에 내놓기 위해서도, 어떤 사건이건 예상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물적 토대가 우선 필요할 것 같다. 중국 무협 드라마도 그렇다. 그 황당한 이야기를 볼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언제까지나 측량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그 대륙이다. 누가 어디 사는지 모르는 땅에만 날아다니는 사람도 하나쯤 숨을 자리가 있다.
그러나 한국의 영화나 드라마가 재미없다거나 볼만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전혀 아니다. 아내와 딸아이가 드라마에 빠져 있으면, 한심하다 싶어 혀를 차다가도 금방 화면에 눈길을 빼앗길뿐더러, 먼저 눈물을 흘려 체면을 구길 때가 여러번이다. 우리 드라마는 연기자의 연기도, 연출가의 안목도, 촬영기사의 시선도 지극히 세련된 덕분에 어느 장면이나 빼놓을 것 없이 훌륭하다. 그러나 그 전체를 보면 늘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여서 아무리 희미한 빛이라도 이 막막한 삶을 조명해 줄 만한 빛을 만난 적은 거의 없다.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는 지는 형국이 우리의 서사에도 있다고 해야 할까.
내가 생각하는 바의 좋은 서사는 승리의 서사이다. 세상을 턱없이 낙관하자는 말은 물론 아니다. 우리의 삶에서 행복과 불행은 늘 균형이 맞지 않는다. 유쾌한 일이 하나면 답답한 일이 아홉이고, 승리가 하나면 패배가 아홉이다. 그래서 유쾌한 승리에만 눈을 돌리자는 이야기는 더욱 아니다. 어떤 승리도 패배의 순간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고, 그 역도 사실이다. 우리의 드라마가 증명하듯 작은 승리 속에 큰 것의 패배가 숨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큰 승리의 약속이 없는 작은 패배는 없다.
드라마에 고종 황제가 얼굴을 한 번 비치면 시청률이 몇 프로씩 떨어진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국권은 빼앗기게 되어 있고 나라가 망하게 되어 있는 것이 결국 한말의 이야기다. 막다른 골목을 누가 알고서야 가려고 하겠으며, 입구가 닫힐 항아리 속에 누가 알고서야 들어가려 하겠는가. 그런데 나는 최근에 한말의 번역활동을 정리한 논문을 읽으면서, 그 시절에 이 나라를 뜨겁게 달구었던 지적 열기에 놀랐다. 사람들은 한 조각의 글에서도 새 세상을 보려고 애썼고, 제가 읽은 것이 한 줌의 절미로 바뀌어 나라를 구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나라가 망했다고 그 열기가 헛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온갖 수단으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의 열정으로 이어졌고, 광복 후에는 민주적인 문화와 사회를 건설하려는 노력의 토대가 되었다. 열정의 시간 속에서는 막다른 골목도 멀리 흐르는 강이 된다.
그러나 그 강의 물줄기가 되는 것은 결국 우리들이다. 막힌 것이 뚫린 것이 되고, 패배가 승리로 바뀌는 지점이 시간 속에 있다고 믿는다면, 시간이 곧 대륙이라고 믿는다면, 가령 봉준호 감독의 <마더>를 보며, 그 불행한 어머니의 막막한 열정과 그 광기에서까지 내 승리의 불빛을 본다고 해서 두려울 것이 없겠다.
황현산 고려대 불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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