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노필 부국장
1월9일, 오랜만에 공개활동에 나선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모습은 예전과 매우 달랐다. 그는 이날 미국의 한 가전 전시회에 부인과 아들딸을 모두 데리고 왔다. 그가 온 가족을 대동하고 공개석상에 나타난 건 전에 없던 일이다. 자식들의 손을 꼭 잡은 채 카메라 앞을 활보하는 것도 못 보던 장면이다. 지난해 말 특별사면 이후 뭔가 작심을 한 듯하다.
한국 재벌가의 양대 산맥인 삼성과 현대가 태동하기 시작한 건 60~70년 전이다. 삼성 창업자 이병철이 삼성상회를 설립한 게 1938년, 현대 창업자 정주영이 현대건설을 세운 해가 1947년이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세대로 따지면 두 세대가 지났다.
이제 또 하나의 세대가 시작됐다는 듯, 요즘 삼성과 현대가 창업주 3세 띄우기에 거침이 없다. 지난해 말엔 그들이 맘껏 일할 수 있도록 원로들을 퇴진시키는 등 주변도 말끔히 정리해줬다. 부회장, 부사장이라는 그들의 직함에 있는 ‘부’자는 보호막에 불과해 보인다. 3대에 걸친 경영세습의 본선이 시작된 셈이다. 그래서 젊은 그들에게 2010년은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경영실적이 무엇보다 절실한 때다.
1월11일, 정부가 마침내 행정부처 이전을 백지화한 세종시 수정안을 발표했다. 국론 분열과 국민적 갈등을 불러일으킬 것을 뻔히 알면서도 수정안을 내놓은 것을 보면 정부 역시 뭔가 단단히 작정한 듯하다.
집권 3년차의 이명박 대통령은 올해 5년 임기의 반환점을 돈다. 2010년은 이 대통령이 통치권을 제대로 써먹을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해다. 그래서 이 대통령에게도 뭔가 확실한 경제실적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 ‘나라의 품격’(국격)을 높이는 기회로 설정한 ‘G20 서울회의’가 11월 열리는 점을 고려하면 가시적 성과는 이를수록 좋다.
권력과 재벌이 함께 조바심에 빠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외환위기의 씨앗을 잉태했던 1990년대 중반의 추억이 그 풍경의 한자락을 엿보게 해준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집권 중반을 맞아 선진국 진입을 목표로 세계화를 선언하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지상과제로 내세웠다. 기업들엔 각종 규제 및 세제 완화 조처가 뒤따랐다.
때마침 경영능력 과시에 몸이 달아 있던 젊은 재벌 2세들로선 절호의 기회였다. 시멘트재벌 쌍용, 소주재벌 진로, 제과재벌 해태의 2세 총수 등이 그들이다. 정부가 깔아놓은 멍석 위에서 이들은 문어발 확장 경영의 깃발을 맘껏 흔들어댔다. 그러나 방만한 경영이 쌓은 빚더미에 눌려 그들은 오래지 않아 재계에서 퇴출됐고, 나라는 오이시디 가입 1년 만에 외환위기를 맞았다. 두 집단의 과욕이 화를 부른 것이다.
당시는 거품의 끝자락이었고, 지금은 불황의 끝자락이라는 점에서 서 있는 자리는 다르다. 하지만 양자의 잘못된 만남이 주는 교훈을 배우는 데는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게다가 지금의 대통령은 재벌 주력기업 사장 출신이다. 재벌의 가려운 곳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이미 출자총액제한, 금산분리 같은 족쇄들을 거의 풀어놨다.
세종시 투자를 결정한 대기업 4곳 중 3곳이 특별사면과 숙원 해소(제2롯데월드 허가)라는 빚을 진 기업이라는 사실을 우연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이 대통령은 ‘공짜는 없다’는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원리를 수십년 동안 기업 현장에서 목격하고 익혔다. 면죄부를 받아쥔 세대교체기의 재벌과 속도전에 이골이 난 임기 반환점의 권력, 서로 눈을 맞추기에 더없이 좋은 궁합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 곽노필 부국장snopil@hani.co.kr
세종시 투자를 결정한 대기업 4곳 중 3곳이 특별사면과 숙원 해소(제2롯데월드 허가)라는 빚을 진 기업이라는 사실을 우연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이 대통령은 ‘공짜는 없다’는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원리를 수십년 동안 기업 현장에서 목격하고 익혔다. 면죄부를 받아쥔 세대교체기의 재벌과 속도전에 이골이 난 임기 반환점의 권력, 서로 눈을 맞추기에 더없이 좋은 궁합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 곽노필 부국장snop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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