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어진 서울셀렉션 기획관리실장
장소는 어디든 좋겠다. 조용한 카페, 또는 작은 모임이 가능한 곳이면 된다. 참석자는 이혼 남녀뿐 아니라 친지와 친구들. 모두 합해서 열 명 범위를 넘지 않기로 한다. 사회자로는 이혼 부부 양쪽을 잘 아는 친구가 적당할 것이다. 사회자가 예식의 시작을 알리면, 서류 정리를 끝낸 두 사람이 각자 결혼생활을 끝내는 경위와 느낌을 말한다. 만남에서부터 이혼에 이른 과정을 돌이켜보는 중 상대에게 탓을 돌리려는 경향이 감지되면 사회 겸 의식집전자는 즉각 냉정주의보를 발령한다. 발언이 격앙되거나 상대방을 향해 과도한 적대감정이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혼의 또다른 당사자인 자녀도 현장에 있게 하는 게 좋겠다. 미성년이라면 물론 참석을 재고할 여지가 있다. 가능하다면 이혼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제3의 인물, 즉 남편이나 아내의 현재 연인이 배석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이 경우 어느 일방의 감정선을 자극할 우려가 있어 대개 제외한다. 다음은 이제 막을 내리는 이 결혼생활이 남긴 성과물을 보고하고 평가할 차례. 아이들의 출산과 양육을 비롯해 재산 형성이나 학위 취득 등 성취에 대한 보고와 평가가 가능하다. 이미 양쪽은 재산 분배를 끝냈을 수도 있겠지만 서로 수긍할 만한 공정한 분배를 인정받기 위해서다. 상대방에게 감사와 축복을 하는 순서가 된다. 1년을 함께했든, 5년, 10년을 함께 살았든, 운명을 함께한 동지이자 연인이었던 상대방에게 어찌 한마디 감사의 말을 빼놓을 수 있겠는가? 헤어지는 마당에 악다구니는 부적절하다. 서로 당부와 격려의 말을 해주고 자녀들에 대한 공동책임을 다시 약속하는 것으로 예식은 마무리된다. 이혼이란 결혼의 종식이지 관계의 종식은 아니다. 남녀관계는 끝나도 자녀들에 대한 부모 노릇이라는 동업자 파트너십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함께했던 날들의 기억은 평생 서로의 기억창고 속에 보존된다. 젊은 날 사랑으로 맺어졌던 두 사람이 ‘이혼 이후’라는 새 세계로 내딛는 전환점에서 서로를 축복함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아닌가? 상대를 지나치게 비난하거나 모든 책임을 상대에게 돌림으로써 함께 살아온 날들을 모욕해서는 안 된다. 사실 부부라는 배타적 독점관계는 많은 부작용을 낳는다. 상대를 너무 가깝게 인식하는 까닭이다. 남편이나 아내를 향한 과도한 기대나 사랑받고 싶은 욕구는 자주 실망과 환멸로 이어진다. 일심동체의 속박에서 풀려나 안전거리를 확보한 지금 독립적인 개인들로서 인간관계를 다시 시작할 수도 있겠다. 한편, 결혼 계약의 파기로 어쩌면 가장 충격적인 생활환경 변화를 겪게 될 자녀들에게 이혼 부부는 정중하게 사과해야 한다. 예의범절이란 웃어른에게만 차려야 하는 것이 아닐 터. 자신들의 결단에 대해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해야 한다. 어린아이들이라면 더욱 섬세한 언어와 태도로 이 절차를 밟아야 할 것이다. 부모 이혼의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함은 물론 이혼 이후 두 사람 사이에 담담하고 평화로운 인간관계가 생성될 수 있음을 알려야 한다. 양쪽 부모형제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 두 가문 사이의 감정대립으로 인한 소모전을 없애야 한다. 평일 오후 텅 비어 있는 작은 예식장을 빌려 이런 통과의례를 치르면 어떨까? 소박한 음식이나 다과를 준비하는 것도 좋겠다. 여럿이 모이는 게 부담스럽다면 단둘이 차 한잔을 앞에 두고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 이런 시간을 갖는다면 더욱 의미가 커질 것이다. 결별에도 품격이 필요하다. 박어진 서울셀렉션 기획관리실장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