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 작가·명지대 교수
어느 날 늦은 아침식사 자리에서 내가 뜬금없이 하는 말. “언젠가, 내 책임으로부터 쏙 빠져나가도 크게 표 안 난다고 생각되면, 난 순례자가 될 거야. 그것이 나의 감춰둔 오랜 꿈이었어. 바랑 하나 메고 히말라야 같은 데로 훌쩍 떠나고 나면, 나를 절대 찾지도 말고 애닯게 생각하지도 마. 원래 없었던 사람으로 생각해줘.”
삼치구이 접시를 앞으로 밀어주던 아내가 내 말에 냉큼 토를 달고 나선다. “당신, 순례자 못 돼!” “아니, 왜?” “당신, 여자 좋아하잖아!” 아내는 득의만면한 표정이고 나는 잠시 짐짓 말문이 막힌 척 창밖을 본다. 잎 떨어진 북악의 겨울숲엔 용수로 받쳐낸 것 같은 해맑은 햇빛이 쫙 내리비치고 있다. “이쁜 여배우 사진 몇 장 바랑에 넣어 가면 되지 뭐.” 나는 우물우물 삼치구이를 씹어넘기면서 혼잣말처럼 대꾸하고 아내는 고소한 듯 웃는다. 그러나 여배우 운운한 나의 마지막 말이 진짜 대답은 아니라는 걸 아내는 눈치채지 못한다. “순롓길에도 순례하러 오는 여자들 많거든!” 내 대답은 본래 이것이어야 맞다. 그러나 내게 불리한 말을 굳이 뭐하러 하겠는가.
몇 년 전 소설 <나마스테>를 냈을 때, 독자와 함께 히말라야를 여행한 적이 있다. 34명의 일행 중 29명은 동행 없이 혼자 온 사람들이었고 그중 반 이상은 여자들이었는데, 사진을 봤으면서도 아내는 그걸 까맣게 잊은 모양이다. 이 어지럽고 바쁜 세상에서, 욕망의 소음이 꽉 찬 저자를 홀연히 떠나 유랑의 고요한 길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야 남녀가 왜 유별하겠는가.
힌두교도들에겐 일반적으로 삶을 운영하는 네 개의 사이클이 있다. 어릴 때는 배우고 익히는 ‘학생기’로 살고, 철들면 일, 결혼, 부모 노릇하며 ‘가주기’(家住期)로 살고, 늙으면 모든 걸 자식에게 물려준 뒤 숲으로 들어가 유유자적 ‘임주기’(林住期)로 살고,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순롓길로 나서 흘러다니는 ‘유행기’(流行期)로 사는 게 그것이다. 이 사이클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하나의 유기체적인 자연으로 보고 그것에 순응해 보편적으로 양식화한 것이다.
동양적 세계관으로 볼 때 순례의 일차적 의미는 순례하는 동안만이라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데 있다. 지구를 파먹고 살아야 하는 운명을 가진 존재는 필연적으로 시간에 따라 죄를 쌓는다. 꼭 필요한 만큼만 ‘파먹고’ 살면 그나마 죄를 가볍게 할 수 있을 터인데, 문명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취해 곳간에 쌓으라 강요하다시피 하니, 욕망이 쌓는 죄를 피할 길이 없다. 과도한 빠른 ‘발전’은 과도한 ‘죄업’의 빠른 축적일는지 모른다. 사람처럼 예민한 존재가 없을진대, 인식하든 말든 영혼의 무의식적 회로에 왜 그런 자격지심이 없겠는가.
그러므로 순롓길로 나서고 싶은 건 인간 본질의 하나라고 본다. 우리가 악을 쓰고 가고자 하는 목표는 목표일 뿐 꿈이 아닐 터이다. 꿈은 목표 너머에 있다. 순례자가 되고픈 것은 목표 너머, 진실로 그리운 걸 보려는 마음이고, 유한한 삶의 슬픔을 넘어서고자 하는 내면적 지향이다. 문제는 길로 나가고 싶은 우리의 본질을 가리는 갖가지 핑계와 얼룩.
겨울숲이 황량하다. 이제 한 해가 가고, 숲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천명을 다한 나뭇잎들은 홀홀 떨어져 어느 길로 흘러가 제 몸을 뉘는가. 잎들이 다 바람의 길로 떠나고 만 겨울숲이 내게 순례의 길로 나서고 싶은 꿈을 은밀히 재촉하고 있다. 순롓길에도 ‘여자’가 많다는 사실은 계속 아내에게 말하지 않을 작정이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때문에 아내의 꿈에 조금이라도 ‘핑계와 얼룩’이 생기는 건 싫기 때문이다.
박범신 작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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