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어진 서울셀렉션 기획관리실장
얼마 전 계단에서 넘어져 오른 발등 인대가 끊어졌다. 깁스를 풀고도 한동안 제대로 걷기가 힘들었다. 그날 점심 무렵에도 꼬인 스텝으로 느릿느릿 풍문여고 골목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다가온 50대 후반의 남성이 내게 던진 말, “아주머니, 뒤에서 보니까 오른쪽 엉덩이가 위로 치켜올라가 있네요. 그렇게 오른발을 바깥쪽으로 놓고 걸으면 골반이 짝짝이가 돼버려 나중에 좌골신경통으로 고생합니다. 오른발을 엄지 쪽으로 45도 각도로 틀어서 걸으세요. 안짱다리로 걸어야만 교정이 됩니다.” 놀라서 쳐다보았지만 점퍼 차림에 등산모자를 눌러쓴 그분의 눈을 제대로 맞추기 힘들었다. “놀라셨지요?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말씀드린 것이니 너무 언짢게 생각지 마십시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정독도서관 쪽으로 사라졌다. 그냥 흘려버려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형외과 전문의도 그런 말을 해준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당장 안짱다리로 걷기 시작한 나. 놀랍게도 사흘 후에 정상보행으로 복귀했다. 다시 만나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따뜻한 밥 한 그릇을 사려고 그 골목길을 몇 번 기웃거렸지만, 그분을 뵙지 못했다. 짧은 순간이었기 때문에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게 문제였다. 그가 먼저 나를 알아보기 전에 내가 그분을 알아볼 도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다시 만나지 못한 아쉬움이 하도 진해서일까? 그분은 내게 올해의 귀인이 되고 말았다. 그날의 감동으로 나는 올 한 해 내게 온갖 사소한 무례를 저지른 모든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일괄사면을 단행했다. 그중에는 지하철 좌석에 붙어 앉고 싶어 한 연인들을 위해 퇴근길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여 자리를 옮겨준 내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생략한 이들도 있다. 또 영화관 좌석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남달리 큰 키를 1센티미터라도 줄여주기는커녕 마냥 꼿꼿한 자세로 2시간 동안 영화를 보아 뒷자리에 앉은 나의 작품 몰입을 방해한 청년, 자신의 큰 키가 영화관에서 민폐임을 모르는 게 분명해 나를 약오르게 했던 터다. 그 모든 이들에 대한 내 짜증과 미움을 한 방에 녹일 만큼 올해의 귀인은 내게 큰 선물을 준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씩 피해의식이 쌓인다. 가족관계도 그렇고 직장생활도 마찬가지. 내가 받는 것보다 남에게 주는 게 더 많은 것 같다. 나만 손해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드니 수시로 우울하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나 역시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며 산다. 언젠가는 판단 착오로 직장에 상당한 재정 피해를 초래하기도 했고, 악의는 없지만 무심하게 던진 말로 남의 심장에 대못을 박기도 했다. 약속에 대한 강박증 때문일까, 시간 약속을 칼같이 지켜 상대방에게 오히려 긴장을 유발한 혐의도 인정한다. 스스로 너그럽다고 자평하지만 때로 편협한 생각과 행동을 일삼고 있음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한다. 결국 나 또한 누군가에게 무례를 저질렀고 불쾌감을 주었으며, 용서를 구해 마땅한 당사자가 아닌가? 올해의 귀인은 내 스텝을 교정해 주시면서 꼬였던 내 마음까지 교정해 주셨나 보다. 내가 때로 조건 없는 호의를 남에게서 무상으로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은 덕분에 내게 무례를 저지른 이들에게 너그러워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가 낯선 이에게 베푼 친절이 이렇게 화학작용을 일으키고 있음을 그분은 아실까? 나는 결심했다. 나도 누군가에게 내년의 귀인이 되기로 말이다. 박어진 서울셀렉션 기획관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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