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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프리즘] 진보는 ‘서동구 사장’을 막았다 / 박창식

등록 2009-11-24 21:36

박창식 정치부문 선임기자
박창식 정치부문 선임기자
2003년 4월2일 오전 11시40분 노무현 대통령은 참모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청와대 기자실을 찾았다. 대선 때 언론고문을 지낸 서동구씨를 <한국방송> 사장에 임명한 게 문제가 되자, 직접 국민들을 설득해보겠다며 언론 앞에 나선 것이다.

그의 요지는 이러했다. “제 마음속에는 방송이라도 좀 공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서동구씨한테도 당신이 해보십시오라고 권했다.” “이를 공개하지 않고 추천한 것이 화근이 된 것 같다.” 노 대통령과 출입기자들 사이에 날 선 공방이 벌어졌다. 기자는 당시 청와대를 출입하고 있었다. 미리 정한 규칙에 따라, 몇 사람만 질문하고 간담회가 끝나려 했다. 이에 기자는 발언권과 관계없이 손을 번쩍 들어, 퇴장하려는 대통령을 불러 세웠다. “대선참모를 지낸 사람을 공영방송 사장에 앉히면 방송의 독립성은 어떻게 되느냐”고 따져 묻자, 노 대통령은 “대통령은 추천도 못 하느냐”고 맞받았다. 다만 그의 표정에는 다소 겸연쩍어하는 기색이 있었다.

그날 저녁 노 대통령은 한국방송 노조, 시민단체 대표자들과의 간담회를 갖고 격론을 벌였다. 그런 끝에 참여정부의 첫 인사 실패작인 ‘서동구 사태’는 그의 자진사퇴로 9일 만에 막을 내렸다.

이 사건을 떠올리는 이유는 이명박 대통령이 자신의 대선참모를 지낸 김인규씨를 한국방송 사장에 앉히려 하기 때문이다. 두 사건은 비슷한 점도 있지만, 차이점이 크다.

우선 “방송이라도 공정했으면 좋겠다”며 사람을 추천했다는 말에선 권력의 공통적인 속성이 읽힌다. 영향력이 큰 전파매체를 어떻게든 영향력 아래 두고 싶기는 두 정권이 마찬가지일 터이다. 다만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이 관여한 사실을 특유의 솔직함으로 털어놓은 것과 달리, ‘이명박 청와대’는 시침을 딱 떼고 있는 정도가 차이점이다.

좀더 본질적 차이는 서동구씨 때에 진보·보수를 가릴 것 없이 시민운동 단체, 언론매체들이 모두 비판에 나섰고, 대통령도 여론을 존중해 자신의 뜻을 바꿨다는 점이다. 특히 이때는 한국방송 노동조합이 앞장섰고, 언론운동 단체와 학계가 뒷받침했다. 정권과 가치관을 공유하는 대목이 있더라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건강성이 진보진영에서 발휘됐다.

그러나 5년 전 “대선후보의 선거참모를 했던 사실만으로 부적격”이라며 서동구씨 임명을 맹렬하게 비판했던 보수진영은 지금, 잣대를 바꿨다. <조선일보>는 “케이비에스 사장후보에 김인규씨…친정 떠난 지 3년 만에 화려한 복귀”(11월20일)라고 보도했다. <중앙일보>는 “방송·통신 융합시대 비전 보여줄 책임자”(˝)라고 했다. 한나라당과 뉴라이트 단체, 보수 성향 학자들도 마찬가지다. 이건 건강성을 잃고 패거리주의로 흐른다는 위험 신호다. 이명박 정부 들어 민주주의 퇴행 이면에는 보수진영의 이중잣대가 도사리고 있다.

한국방송 노동조합의 태도도 주목된다. 서동구씨는 노조의 강력한 문제제기로 낙마했다. 문제제기는 정당했다. 그러나 지난해 이명박 정부가 본격적인 방송 장악에 나설 때, 노조는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일부 직원들이 사내 임의단체인 ‘사원행동’을 중심으로 맞서 싸웠으나 역부족이었다.


한국방송 노조는 김인규씨가 사장으로 임명된다면 총파업으로 맞서겠다고 공언해왔다. 약속을 지키리라 믿는다. <경향신문> 출신인 서동구씨와 달리, 김인규씨는 한국방송 공채 1기 출신으로 내부 인맥 기반이 꽤 있다고 한다. 한국방송 사람들이 ‘공영방송의 독립성’이라는 명분보다, 내부 출신이라는 ‘밥그릇 공감대’에 쏠리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박창식 정치부문 선임기자cspcs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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