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호 신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청년 시절 일본군 사관학교에 입대하고자 혈서로 청원했다는 친일 행각이 드러나 누리꾼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친일 인명사전이 정리되어 발간된 계기에서다. 일본 강점기 시대 친일 인사들이 호사를 누리며 자녀를 유학으로 공부시킬 때 풍찬노숙의 항일 독립군들은 부모나 처자식도 챙기지 못하고 비참한 빈곤과 핍박받는 삶을 연좌의 유산으로 남겼다.
친일 선조를 둔 후손은 기회와 배경으로 정치·기업·법조·교직·문화 모든 분야에서 실력자가 되었는데, 독립군의 후손은 피지배계급의 하층민으로 살아가는 악순환의 구조를 만들었다는 것이 학자들의 정설이다. 근현대사도 바로잡지 못하기에 우리는 ‘민족은 있어도 민족혼이 없는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민족정신은 윤리와 도덕의 우물이다. 친일과 독립운동! 동시대의 두 가지 행동 양식 중 무엇이 민족정신이어야 하는가? 오늘날 국가적으로 기념하는 것은 당연히 침략에 저항했던 인물들의 삶이지만, 그 기념식을 마련하는 이들은 친일을 도모했던 삶과 더 깊은 맥을 갖는다. 그래서 형식적이다. 친일 인맥이 사회 전반의 주도권을 잡고 오늘에 이르기 때문이다. 민족의 불행이다.
반민특위의 좌절 이후 ‘역사 청산’의 실패는 현재 우리 사회에 끝없는 분열과 갈등을 파생시키는 원죄로 살아 있다. 원죄의 정화 성사가 없는 한 우리는 스스로 끈질긴 자학의 고통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것이다. 새로운 미래도 열릴 수 없다. 그 과제가 이제 4, 5대 후손 세대까지 넘어간다는 점에서 객관적 기록을 챙겨두는 인명사전의 작업은 우리 시대 중요한 책무다.
혹자는 그 시대 환경에선 어쩔 수 없었다고 변호한다. 박정희 유신 치하 정치도 같은 논리를 펴고 싶을 것이다. 추위에 떨며 남의 모닥불에 잠시 언 손을 녹인 죄를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동포를 억압하고 핍박하는 일에 자발로 종사하며 기회를 모색했던 이들은 왜 자신의 행실이 이기적인 것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까. 이기와 탐욕이 역사의식을 가렸기에 생긴 일일진대 말이다.
도올 김용옥의 희곡 <천명>은 동학혁명을 다루고 있다. 일본군과의 전면전에 대하여 동학의 지도자들은 반대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나서는 것이 천명이라 인준한다. 그러나 우금치 전투에서 죽어간 동학군도의 가족들은 살아남아야 했다. 그들에겐 자식을 낳고 기르고 증언해야 하는 것이 천명이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역사를 이어가는 실이고 지도자는 실을 감는 실패’다.
가톨릭의 성경에는 ‘마카베오’라는 역사서가 있다. 기원전 160여년경 고난당한 유대인들의 신앙고백 기록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돼지고기를 먹을 수 없었다. 침략자들은 유대인의 자존심과 정신세계를 파괴하고자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한다. 어떤 이들이 순종했지만 하느님과 율법에 대한 지조를 지켜 순교한 이들이 많았다. 한 원로는 ‘먹는 흉내만 내고 살아나라’는 친구의 귀띔에 “늙은이가 목숨을 구하고자 돼지고기를 먹는다면 젊은이들이 나에게 무엇을 배우겠는가?” 하며 처형당했다. 이것이 진정한 지도자상이다.
삶의 모든 행위는 역사라는 판관 앞에서 해명해야 한다. 역사의식이란 미래의 눈으로 현재의 나를 보고 내 행위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것이다. 그래야 정의와 진리의 기준을 고수한다. 남북관계도 대운하도 4대강도 에프티에이도 아프간 파병도, 대미 대일 관계의 주체성도, 용산참사 해결문제도 역사의식의 눈에는 해답이 보이는 거다.
아이들을 위해서 영어마을 앞에 ‘역사 마을’을 세워? 아, 좋은 생각이다! 박기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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