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 고려대 불문학과 교수·문학평론가
소년이 어른으로 성장할 무렵에 김지하 선생이 놀던 곳은 내가 놀던 곳이었다. 선생의 고향 마을인 목포시 성자동은 우리 동네와 작은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고, 그 거리는 오 리가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과 나 사이에는 5년이라는 나이 차이가 있고, 다니던 고등학교가 달라, 내가 선생을 직접 대면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훗날의 일이다.
내가 고교 1학년일 때, 서울대 미학과 학생이었던 김지하 선생은 방학중에 목포에 내려와 자기 모교의 문예반 후배들을 이끌고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상연했다. 나도 그 연극을 구경했지만, 그때는 지하라는 필명은 물론 김영일이라는 본명도 알지 못했다. 내가 그 연극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감명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거기에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은 알았으며, 우리가 일상 쓰는 언어로 우리가 사는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 연극은 내가 대학으로 진학할 때 학과를 선택하는 데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지하 선생의 담시 ‘오적’과 첫 시집 <황토>가 세상에 나온 것은 내가 사병으로 군복무를 할 때의 일이다. 환상적일 정도로 엄혹했던 저 유신독재 시절에, 그것도 병영에서, 내가 이 ‘반역’의 시와 시집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사람들의 위험하고 기적 같은 도움이 있었던 덕택이다. ‘오적’은 서울에 있는 친구들이 그 등사본을 다른 책들 사이에 넣어서 보내주었다. <황토>는 우리 부대에 유신체제를 홍보하러 나온 정훈장교의 가방 속에서 나왔다. 내가 그 책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자 장교는 그것을 내 책상머리에 놔두고는 다시 찾지 않고 가버렸다. 나는 몸을 떨면서 지하 선생의 시를 읽었다.
내가 군에서 전역한 지 얼마 후에 지하 선생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영어의 몸이 되었다. 그 무렵 고향 집에서 대학원 입학을 준비하며 프랑스 소설 하나를 번역하고 있던 나는 틈만 나면 지하 선생의 동네를 둘러싸고 있는 비녀산과 안장산에 오르고 바닷가의 개펄로 나갔다. 나는 내 고향 시인 지하 선생의 눈으로 산과 바다를 바라보고 싶었으며, 거기서 선생이 했을 생각을 나도 하려고 애썼다. 하늘이 거대한 절망으로 땅을 덮을 때, 땅 밑에서 돋아 올라오는 고독하고도 치열한 기운에 몸을 맡길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박경리 선생의 <토지>가 완간된 1996년 초가을에 그것을 기념하여 열린 학술행사에서 나는 지하 선생과 첫 대면을 했다. 선생은 내 발표를 칭찬하며 ‘생명의 소설’이라는 말에 특히 관심을 보였다. 나로서는 땅과 하늘과 사람을 모두 포괄하는 지하 선생의 생명철학에 비해 촌부들의 삶에 불과한 내 생명이 너무 초라해서 오직 민망할 뿐이었다. 그리고 몇 년 후, 김현 선생을 기리는 문학비 제막식에 참석하려고 문단 사람들이 목포에 갔을 때, 지하 선생과 길게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공식행사가 끝난 후 술자리에선데, 내가 비녀산과 안장산 이야기를 꺼냈더니, 선생이 그런 산도 있었다는 식으로 겨우 생각난 듯이 대답하여 나는 조금 실망했다. 그러나 선생은 마침내 “아 우리가 같은 마을 사람이네” 하면서 내게 술 한 잔을 더 권했다.
선생은 요즘 납득하기 어려운 글도 쓰고,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인터뷰도 종종 한다. 선생은 하고 싶은 말을 할 자유가 있으며, 그 자유를 위해 싸워왔다. 그런데 선생의 이상한 말들이 저 초라한 비녀산과 안장산에서 고독하면서도 찬란하게 돋아 오르던 풀잎들을 때아닌 황사처럼 덮을 때는 가슴이 송곳에 찔리는 듯 아프다.
황현산 고려대 불문학과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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