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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김지하 선생을 추억한다 / 황현산

등록 2009-11-13 20:05

 황현산  고려대 불문학과 교수·문학평론가
황현산 고려대 불문학과 교수·문학평론가
소년이 어른으로 성장할 무렵에 김지하 선생이 놀던 곳은 내가 놀던 곳이었다. 선생의 고향 마을인 목포시 성자동은 우리 동네와 작은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고, 그 거리는 오 리가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과 나 사이에는 5년이라는 나이 차이가 있고, 다니던 고등학교가 달라, 내가 선생을 직접 대면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훗날의 일이다.

내가 고교 1학년일 때, 서울대 미학과 학생이었던 김지하 선생은 방학중에 목포에 내려와 자기 모교의 문예반 후배들을 이끌고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상연했다. 나도 그 연극을 구경했지만, 그때는 지하라는 필명은 물론 김영일이라는 본명도 알지 못했다. 내가 그 연극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감명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거기에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은 알았으며, 우리가 일상 쓰는 언어로 우리가 사는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 연극은 내가 대학으로 진학할 때 학과를 선택하는 데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지하 선생의 담시 ‘오적’과 첫 시집 <황토>가 세상에 나온 것은 내가 사병으로 군복무를 할 때의 일이다. 환상적일 정도로 엄혹했던 저 유신독재 시절에, 그것도 병영에서, 내가 이 ‘반역’의 시와 시집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사람들의 위험하고 기적 같은 도움이 있었던 덕택이다. ‘오적’은 서울에 있는 친구들이 그 등사본을 다른 책들 사이에 넣어서 보내주었다. <황토>는 우리 부대에 유신체제를 홍보하러 나온 정훈장교의 가방 속에서 나왔다. 내가 그 책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자 장교는 그것을 내 책상머리에 놔두고는 다시 찾지 않고 가버렸다. 나는 몸을 떨면서 지하 선생의 시를 읽었다.

내가 군에서 전역한 지 얼마 후에 지하 선생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영어의 몸이 되었다. 그 무렵 고향 집에서 대학원 입학을 준비하며 프랑스 소설 하나를 번역하고 있던 나는 틈만 나면 지하 선생의 동네를 둘러싸고 있는 비녀산과 안장산에 오르고 바닷가의 개펄로 나갔다. 나는 내 고향 시인 지하 선생의 눈으로 산과 바다를 바라보고 싶었으며, 거기서 선생이 했을 생각을 나도 하려고 애썼다. 하늘이 거대한 절망으로 땅을 덮을 때, 땅 밑에서 돋아 올라오는 고독하고도 치열한 기운에 몸을 맡길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박경리 선생의 <토지>가 완간된 1996년 초가을에 그것을 기념하여 열린 학술행사에서 나는 지하 선생과 첫 대면을 했다. 선생은 내 발표를 칭찬하며 ‘생명의 소설’이라는 말에 특히 관심을 보였다. 나로서는 땅과 하늘과 사람을 모두 포괄하는 지하 선생의 생명철학에 비해 촌부들의 삶에 불과한 내 생명이 너무 초라해서 오직 민망할 뿐이었다. 그리고 몇 년 후, 김현 선생을 기리는 문학비 제막식에 참석하려고 문단 사람들이 목포에 갔을 때, 지하 선생과 길게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공식행사가 끝난 후 술자리에선데, 내가 비녀산과 안장산 이야기를 꺼냈더니, 선생이 그런 산도 있었다는 식으로 겨우 생각난 듯이 대답하여 나는 조금 실망했다. 그러나 선생은 마침내 “아 우리가 같은 마을 사람이네” 하면서 내게 술 한 잔을 더 권했다.

선생은 요즘 납득하기 어려운 글도 쓰고,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인터뷰도 종종 한다. 선생은 하고 싶은 말을 할 자유가 있으며, 그 자유를 위해 싸워왔다. 그런데 선생의 이상한 말들이 저 초라한 비녀산과 안장산에서 고독하면서도 찬란하게 돋아 오르던 풀잎들을 때아닌 황사처럼 덮을 때는 가슴이 송곳에 찔리는 듯 아프다.

황현산 고려대 불문학과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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