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 작가·명지대 교수
스물몇 살 시절, 가난한 문학청년이었던 나는 애인에게 프러포즈하면서, 그때로서는 터무니없는 큰소리를 쳤다. “지금은 비록 단칸방 신세로 살아가야 할 처지지만, 한 가지는 네게 약속할 수 있어. 언젠가 서울의 양지바른 곳에 너랑 함께 살 번듯한 내 집을 언젠가 지을 거라는 것!” 애인은 내 흰소리에 말없이 웃기만 할 뿐이었다.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생쥐 볼가심할 것도 없는 형편에다가 문학으로 밥 벌어먹을 가망성이 거의 없던 시절이니, 나나 듣는 애인이나 그 ‘큰소리’는 흰소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행랑이 몸채 되는 수도 있다고, 어찌어찌해서 사는 형편이 나아지자 냉큼 그 약속이 생각났다. 내 집을 직접 짓지 않으면 영원히 떠돌이를 면하지 못할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직접 짓고 살림을 들여놓은 것이 바로 지금 살고 있는 집이다.
집터를 구하고 설계를 맡기게 됐을 때 나는 설계사에게 불문곡직 이렇게 말했다. “무조건 모든 공간에 햇빛이 쫙 들게 해주세요.” 설계사는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집이란 ‘그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평생 어두컴컴한 방에서만 살아서 그래요. 내 말대로 해주세요.” 내가 속이 좁쌀 같고 모난 것은 모두 좁고 어두운 방에서 자랐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설계사는 다행히 내 소원을 들어주었다. 북쪽이나 서쪽에 있는 방에까지 햇빛이 드는 집을 그래서 나는 서울살이 20여년 만에 갖게 되었다. 창이 넓은 방에서 살게 되는 내 아이들은 최소한 나보다 품이 넓고 밝게 자랄 것 같았다.
그러나 자라면서 애들이 울근불근 조금씩 속을 썩이기 시작했다. 막둥이는 중학교 때 이미 무면허로 한밤중에 내 차를 몰고 나가 나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심리학을 하는 친구가 어느 날 말했다. “막둥이 방을 바꿔줘 봐. 지난번 보니까 남쪽부터 동쪽까지 그 녀석 방의 창이 너무 넓더라구. 숨을 데가 없는 구조의 공간에서 계속 살면 산만해질 수 있거든.” 나는 아뿔싸, 내 스스로 형틀 지고 와서 매 맞을 짓거리를 했다고 느꼈다. “집은 숨바꼭질하기 좋아야 해. 다락도 좀 있고 광도 있고 해야 사람은 안정감을 갖거든. 벽이 없고 그늘이 없으면 어디서 쉴 수 있겠어?” 친구는 덧붙였다.
가을이 깊어지자 아내가 떼어놨던 두꺼운 커튼을 단다. 집 안이 훨씬 아늑해진다. 여름에 정신이 산만한 것은 외부로 열린 창을 활짝 열어놓기 때문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벗어 던졌던 옷가지를 하나씩 둘씩 주워 입고 창과 덧문을 닫아걸면 내면의 방은 오히려 넓어진다는 것이다. 십만송의 성인인 밀라르파도 그래서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면 ‘고독한 동굴을 너의 아버지로 삼고/ 정적을 너의 낙원으로 만들라’ 노래했던 모양이다. 자고로, 영혼의 지평을 넓혀온 선지자들이 ‘동굴’에 은거한 예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없이 많다.
하지만 오늘의 우리는 창과 덧문을 닫고 두꺼운 커튼까지 쳐봐도 기실 숨을 곳이 없는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이른바 정보화시대라고 하지 않는가. 그 점에서 우리나라는 최고의 선진국 수준이다. 이제 누구의 삶이든 어떤 비밀, 비의(秘意)도 존재할 수 없다. 밤이 와도 ‘대낮’ 같은 세상이다. 정보의 빛은 벽과 창과 덧문을 날카롭게 관통해와 우리의 의식을 전천후로 흔들어 깨운다. 어디든지 잠시나마 머물 수가 없는 건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 되었다.
아마도 현대인의 불안한 삶은 ‘동굴’을 잃어버린 것에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불멸>의 작가 밀란 쿤데라는 ‘과거의 한량’들은 ‘신의 창’으로 들어갔다고 표현한 바 있다. 집이 그렇듯이 한 사회도 ‘숨바꼭질하기 좋은 집’이 된다면 더러 우리가 ‘신의 창’으로 들 기회도 생기지 않겠는가.
박범신 작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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