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식 정치부문 선임기자
이명박 대통령 때문에 어지럽다. 멀쩡한 세종시 건설 방침을 수정하겠다면서, 정국을 소용돌이에 몰아넣은 탓이다. 중대한 사정 변경이 없는데 국회를 통과한 ‘국민과의 약속’을 뒤집는 것은 곤란하다. 정운찬 총리,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를 앞세우고 뒤에 숨는 듯한 모양도 좋지 않다.
이런 행태는 무엇보다 10·28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의 민심에 어긋난다. 국민들은 이명박 정부가 지지율이 잠깐 올랐다고 세종시, 노동 정책, 4대강 등 주요 정책들을 뒤집거나 밀어붙이는 모습에 실망을 표시했다. 그런데도 이명박 정부는 아프가니스탄 재파병까지 하겠다고 한다. 2007년의 철군 취지를 뒤집고 국제사회의 신뢰를 깨는 일이다.
민심을 엉뚱하게 읽기로는 정세균 민주당 대표도 마찬가지다. 그는 지난 1일 기자회견을 통해 “민주정부 10년 동안 여러 정책을 추진해 나름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는데 거기에 매달리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는 “진보냐 보수냐라는 이념논쟁을 초월해, 국민 대다수에게 실질적 혜택이 돌아가는 정책이라면 정책의 출발점과 성격을 가리지 않고 과감히 수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진보냐 보수냐라는 이념 논쟁을 초월해 …”라는 말은, 정치인들이 진보개혁에서 벗어나 ‘오른쪽’으로 한 칸 이동할 때 보통 쓰는 레토릭이다. 측근들도 “집토끼가 어느 정도 잡혔으니 이제 산토끼를 잡으러 …”라는 말로 배경을 설명한다. ‘과감한 변화’를 10·28 재보궐 선거 이후 민주당의 화두로 제시하되, 변화 방향은 진보 강화보다는 그 반대쪽을 잡은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의 재보궐선거 선전은 20~40대 젊은 지지자들이 돌아와준 덕분이다. 수원 장안에선 대학생들이 대거 투표했으며, 경남 양산에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젊은 샐러리맨들이 투표장에 줄을 섰다. 젊은 지지자들은 당연히 진보개혁 강화를 요구한다.
정 대표는 과감한 ‘정책 변화’의 예로, 노인 틀니와 보청기, 경로당 난방비 국고 지원 등을 제시했다. 필요한 정책들이다. 그러나 야당이 경로당 난방비 국고지원 정도의 정책을 갖고, ‘중도실용’ ‘친서민’을 내세우는 정부 여당과 차별성을 드러내며 경쟁력을 인정받을지 의문이다.
게다가 민주당에는 정 대표가 임채정 전 국회의장한테 이끌어주도록 요청해 구성된 ‘민주정부 10년 위원회’가 가동중이다. ‘잃어버린 10년’ 담론에 맞서, ‘민주정부 10년’의 정체성을 되찾자고 만든 기구이다. 이 위원회에선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보수세력과 관료집단의 눈치 때문에 좌고우면했던 전례를 성찰하고, 민주당의 진보적 색채를 한층 강화하는 미래 비전을 논의중이다. 이런 마당에 정 대표가 “민주정부 10년 … 거기에 매달리지 않겠다”고 했으니 어지러울 수밖에 없다.
지난해 9월25일 정 대표와 이명박 대통령과의 청와대 회담 기억이 문득 되살아난다. 그는 촛불 이후 인권 탄압이 마구 저질러져 투쟁이 필요하던 국면에서, 대안야당론을 주장했다. 그러던 끝에 이 대통령과 만나 주요 정책 협력을 다짐했다.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회담 결과를 두고 “투 굿 투 비 트루(too good to be true)다. 참으로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다”고 흡족해했다. 당내에선 ‘야당다운 짠맛’을 잃었다는 비판들이 쏟아졌다. 그때 정 대표는 특보단장인 전병헌 의원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는데, 이번 기자회견도 전략기획위원장이 된 전 의원이 준비를 도왔다.
대통령은 민심의 경고에도 오만함을 드러내고 있다. 야당 대표는 어렵사리 승리를 안겨줬더니 벌써부터 행보가 의아스럽다. 박창식 정치부문 선임기자cspcsp@hani.co.kr
대통령은 민심의 경고에도 오만함을 드러내고 있다. 야당 대표는 어렵사리 승리를 안겨줬더니 벌써부터 행보가 의아스럽다. 박창식 정치부문 선임기자cspcs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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